"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
80년대에 방영되었던 만화영화,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이다. 아직도 가사가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빨강머리 앤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중년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앤의 매력에 푹 빠졌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앤을 처음 만난 건 중학생 때였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만화 속 배경은, 푸른 들과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초록지붕 집이 있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주근깨투성이 얼굴로, 쉴 새 없이 이야기하던 앤에게 단숨에 반해 버렸다. 당시 나도 앤처럼 마르고 얼굴에 주근깨도 많았다. 그런데 앤의 밝고 꿈 많은 모습을 보고, 큰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저녁에 자매들과 만화를 재미있게 본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앤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다음 에피소드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엄마가 사 준 계몽사 문고판 ≪빨강머리 앤≫을 너무 좋아해 아껴 읽었던 기억이 있다. 빨강머리 앤은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웃음을 잃지 않게 한 희망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그 책은 아직도 내 책장에 소중히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딸을 둔 엄마가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1985년에 제작된 캐나다 드라마, <빨강머리 앤( Green gable's Anne)>을 딸과 함께 시청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에 낭만적인 음악과 따뜻한 이야기가 어우러진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도 나의 최애 작품이다. 딸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앤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최근에 제작된 넥플릭스의 <Anne with an "E">도 좋아하지만, 사회적 이슈를 반영한 현실적 접근 방식은 여전히 앤의 순수한 세계를 간직하고 싶은 내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날, <빨강머리 앤>에 빠져 있던 딸이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도 앤처럼 옛날 드레스를 입고 싶어요."
갓 초록지붕 집에 온 앤은 주일학교에 가야 했다. 하지만,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자, 마릴러는 직접 옷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앤은 당시 유행하던 '퍼프소매(puffed sleeves)'가 달린 예쁜 드레스를 간절히 원했지만, 마릴러는 실용적이지 않다며 평범한 드레스로 만들어 준다. 이후 매튜가 퍼프 소매가 달린 하늘색 드레스를 선물해 주자, 앤은 너무 기뻐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딸은 드라마 속 소녀들이 입던, 19세기 풍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털목도리도 겨우 뜨는 내게, 옷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순간,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시어머니는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직접 옷을 만들어 왔다. 남편과 시누이가 어릴 적 입었던 옷부터 내가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스웨터와 모자, 양말까지 손수 뜨개질해서 보내 주셨다. 솜씨가 워낙 좋아, 동네 레이스 모임의 리더로 활동하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레이스나 손뜨개 도일리를 자주 선물 받곤 한다. 염치없는 우리 모녀가 시어머니에게 '빨강머리 앤 콘셉트'로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니,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당시에는 홍콩에 살던 시절이라, 직물로 유명한 삼수이포 시장(Sham Shui Po Fabric Market)으로 갔다. 그곳에서 드레스 천을 사고,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줄 옷감도 선물로 골랐다. 딸은 보라색과 초록색이 들어간 잔꽃무늬 원단과 분홍색 리본을 선택했다. 치마와 소매 밑단에 들어갈 레이스는 시어머니가 오래전 직접 떠 둔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아이의 치수를 재고, 넓은 종이보드에 드레스 모양을 치수에 맞게 그려 넣었다. 앤이 원하던 '퍼프'는 딸이 보기에도 '투머치(too much)'였는지, 과장되지 않고 살짝만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시어머니는 마릴라와는 다르게 손녀딸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디자인했다.
그리고 천을 자르고 재봉틀을 돌리더니, 이틀 만에 드레스를 완성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드레스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딸은 앤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리고는 드레스를 입고,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은 마치 초록 지붕의 앤을 보는 듯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드레스로 좋은 추억을 선사해 준 시어머니에게 정말 감사했다.
딸이 드레스를 입고 행복해하던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바랐다. 힘든 일이 있어도, 딸이 앤처럼 슬기롭고 꿋꿋하게 자라나기를.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딸은 점점 굳센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편, 내 얼굴에 옅어졌던 주근깨는 제주 시골에 살면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주근깨가 싫지 않다. 앤이 가르쳐 주었던 대로, 삶의 그 어떤 모습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드라마 사진 출처> https://www.anneofgreengables.com/blog/the-unofficial-history-of-the-puff-sle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