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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창문에 숨겨진 비밀

by 새벽별

대부분의 유럽 건축물이 그러하듯, 덴마크 주택에도 창문이 유난히 많다. 창가에는 화분, 촛대, 램프, 피겨린 등이 놓여 있어, 밖에서 보아도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그러나, 이런 일상의 아름다움을 넘어, 몇몇 창문에는 조용한 저항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 창문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든다. 바로 창문 모양이 덴마크 국기, '단네브로'를 세로로 길게 늘어놓은 듯 닮았기 때문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은 국기 중앙의 하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를 본떴다. 붉은 벽돌로 마감한 외벽이나 붉은 지붕은 단네브로의 빨간 바탕색을 상징한다.


시부모님의 시골집 역시 전형적인 남덴마크식 주택으로, 이러한 상징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창문이 단순히 장식적이거나 실용적인 요소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통해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된 후, 창문이 전혀 다른 시선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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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남덴마크 커피테이블>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1864년부터 1920년까지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덴마크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생활 속 작은 요소들에 단네브로의 상징을 녹여내며 조용히 저항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문 디자인이다.


이러한 저항의 흔적은 음식에서도 발견된다. 생일케이크나 디저트는 크림색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빨간색 시럽이나 딸기로 장식했다. 덴마크의 전통 페이스트리에도 빨간색 딸기 시럽에 흰색 아이싱을 뿌려 단네브로를 연상시키도록 했다. 이는 단순히 미적요소를 넘어, 덴마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일환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반세기 후인 1920년에, 드디어 그 결실을 맺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그해에, 이 지역에서 덴마크와 독일 국경을 결정하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75퍼센트라는 많은 주민이 덴마크와의 재통합에 찬성했고, 이 남부 지역은 다시 덴마크 영토가 되었다. 100여 전에, 국가의 경계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결정했다는 점은 지금도 인상 깊다.



덴마크인의 일상 속 저항은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절과도 닮아 있다. 일제는 35년 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했다.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여 한국인의 정체성마저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몰래 한글을 가르치고, 태극기를 숨겨두고,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다.


1919년 3월 1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고, 해외에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안타깝게 무력으로 희생되었다. 이는 평화적 식민 통제하에 있던 남덴마크의 저항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나라 모두 억압된 환경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지키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시골집은 시아버지의 부모님이 살던 집이 화재로 소실된 후, 시부모님이 결혼하면서 그 집터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때가 60년대 말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수리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점령이 끝난 뒤에도, 저항의 전통을 이어온 셈이다. 시부모님이 이 낡은 집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두 나라 국민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덴마크의 창문에서, 그리고 한국의 3.1 운동에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똑같은 열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덴마크를 여행한다면, 단네브로가 숨겨진 창문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저항의 역사를 떠올리며, 동시에 쏠쏠한 여행의 묘미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덴마크 역사: https://en.wikipedia.org/wiki/South_Jutland_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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