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별 Nov 24. 2024

해녀 할망과 신생아

제주도 시골 살기 15

볕이 한창 좋던 지난 5월, 새벽에 냥이들 밥을 주러 1층으로 내려갔다가 넘어져서 손목을 다쳤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골절이었고, 그날 오후에 수술을 받았다. 빈 병실이 있어 바로 6층 다인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이 바빴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된 상황이 정말 속상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어쩌면 좀 쉬어 가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원래 6인실이었지만, 코로나 이후 4인실로 운영되고 있었다.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는 탁 트인 서쪽 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병실에는 80대 어르신 두 분과 60대 언니가 계셨다. 인사를 드리니 50대 초반인 나를 보며, "아휴, 신생아가 왔네. 어쩌다 다쳤수꽈?" 하시면서 걱정해 주셨다. 아파서 왔지만, 그 말에 위로를 받아 기분이 좋아졌다.


왼편에 화장실이 있는 침대를 배정받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내 오른쪽 자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통창이 바로 옆에 있고 간병인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넓어 가장 좋은 곳이었다. 40대 정도의 간병인이 허리를 다친 60대 김언니를 돌보고 있었다. 부산 출신의 김언니는 왜소한 몸매지만 여장부 같은 스타일이었다. 전신이 마비된 젊은 딸을 돌보느라고 이제는 엄마인 자신이 병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항상 웃는 얼굴로 병실 분위기를 활기 있게 해 주었고, 인기가 좋은지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병실에서 바라본 해넘이 풍경>


손목 하나 부러졌을 뿐인데, 일상이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다. 먹고, 씻고, 화장실 가는 것까지 뭐 하나 쉽지 않았다. 남편은 주말에만 병실에 와서 나를 도와줄 수 있었다. 다른 일은 힘들어도 내가 할 수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식판 반납이었다. 배식을 받을 때는 병원 직원이 직접 가져다주지만, 식사를 마친 후에는 환자 쪽에서 식판을 들고 복도를 지나 배선실에 반납해야 했다.


한 손은 골절로 깁스를 하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진통제와 항생제가 달린 수액 걸이를 끌고 다니는 상황이라 두 손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 나를 옆자리 간병인 언니가 도와주었다. 나보다 젊었지만, 편하게 언니라 불렀는데, 내가 부탁도 하기 전에 식판을 치워줘서 무척 고마웠다. 그 언니는 간병인이 없거나 가족이 자리를 비운 다른 환자들까지 도와준 따뜻한 사람이었다.


건너편 침대에는 80대 어르신들이 계셨는데, 다음날 그중 한 분의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그리고 허리를 다친 60대의 윤언니가 다. 조경 일을 하는데, 넘어지면서 허리를 다쳤다고 했다. 서울 출신으로 제주 남자와 결혼해 제주에 정착하게 되었단다. 


윤언니는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면서 딸 하나를 키워 낸 강인한 사람이었다. 혼자 벌면서 생활하는데, 다쳐서 일을 못하게 될까 봐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그 언니는 초면인데도 본인의 인생사를 거리낌 없이 쭉쭉 풀어놓았다.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줬다. 그러던 중 TV 뉴스에 윤 대통령이 나와서 사람들이 불평을 하니, "나는 같은 성씨라서 그냥 '윤' 찍었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해, 병실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틀 후에 다른 어르신이 퇴원하시고, 할망 한 분이 입실하셨다. 나와 같이 손목 골절로 오셨는데, 동병상련이라고 마음이 더 가고 안타까웠다. 연세가 87세이신데, 물질하러 가시다 넘어지셔서 손목이 부러졌다고 했다. 아, 해녀시구나! 어쩐지 그 연세에도 허리도 꼿꼿하시고 걸음걸이도 불편함이 없으셨다. 아프셨을 텐데 "이 정도쯤이야" 하는 의연함도 느껴졌다.


해녀 할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신기했다. 얼굴에 새겨진 자글자글한 주름에서 반 세기를 해녀로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며느리 이 와서 수발을 들었고, 밤에는 아들들이 와서 교대로 어머니를 지켰다. 주말이 지나니, 서울에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큰딸이 내려와 간호하였다.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그 흔치 않은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4일 차에 윤언니는 더 큰 병원으로 허리 검진을 받으러 떠났고, 내 옆자리 김언니도 퇴원하면서 간병인도 함께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 식판을 반납해  것에 너무 고마워 작은 차비를 드리니 한사코 거절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손에 쥐어 드리고 나니, 내 마음이 좀 편해졌다.


김언니가 떠나자 최상의 자리가 비었다. 그런데 병실에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에게 더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침대를 정리하던 직원이 나에게 옮길 거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3일 정도만 더 있을 사람이라, 해녀 할망과 따님이 같이 지내기에 그 자리가 좋을 것 같아 양보해 드렸다.




병원에 있는 동안 아픈 사람들만 보니 더 아픈 것 같고, 어이없게 다친 것에 속상해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주로 커튼을 치고 지인이 보내준 책을 읽으며 지냈다. 식사 시간에는 배식을 받으니, 커튼을 열어놓은 채로 밥을 먹었다. 해녀 할망께 자리를 양보해 드린 그날, 저녁을 먹고 있는데 할망 따님이 음식 한 그릇을 가져오셨다.


저염식의 병원밥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어머니가 직접 만든 도토리 묵인데 올케가 무쳐서 가져왔어요. 병원 밥이 어머니 입맛에 안 맞아서요. 자리 양보해 주신 것도 너무 고마웠어요."


하하! 도토리 묵이다. 병원에 입원했던 사람들은 알리라, 무채색 같은 병원밥의 맛을. 저염식을 추구하는 나에게 그리 나쁘지는 않았으나, 4일 내내 먹어보니 너무 맛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양념이 골고루 배인 색감도 예쁜 도토리묵이 등장했다! 해녀 할망도 인자하신 눈빛으로 어서 먹어 보라 재촉하셨다.


"묵을 직접 만드셨다고요?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잘 먹겠습니다. 호호"


아, 얼마나 맛있던지! 사진 찍을 생각도 못하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흡입해 버렸다. 어렸을 적에 가을이 되면 할머니와 언니하고 뒷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주웠다. 도토리가 한두 자루 차면 집으로 내려와 물에 불렸다가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고 도토리를 힘겹게 맷돌에 돌려서 갈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걸 끓여 연한 갈색빛 묵을 만드시고는 누구네 집에 갖다 줘라 하시면서 이웃을 챙기셨다. 해녀 할망의 도토리 묵에서 정이 듬뿍 인 그때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도토리 묵 이후로도 해녀 할망 따님은 채소 샐러드와 기막힌 양념 소스를 가져왔고, 참외 한쪽도 잘라서 가져오셨다.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안 갖다 드리면 어머니가 화내신다고 하면서 계속 챙겨주셨다. 그리고 내 식판도 항상 거두어 가셔서 황송할 정도였다. 떠나간 언니들이 있을 때도 항상 나눠 먹는 분위기였다. 내가 주치의를 만나고 오면 상에 도넛이나 호떡이 놓여 있었다.


나도 뭔가를 드리고 싶었지만, 남편이 가져온 비타민 드링크만 초라하게 내 캐비닛을 차지하고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그거라도 드렸다.


"어르신, 수술하셨는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해녀 일을 지금도 하시다니 대단하세요!"

"예, 괜찮...   물질하러 가다..."


해녀 할망과 말을 나누고 싶어 여쭤봤다. 할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을 이어가셨지만, 앞부분만 알겠고 뒤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할망도 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컨디션이 괜찮다는 것만 확인하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루에 한 번 손목을 소독해 주던 간호사는 제주 사람으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랑이었다. 소독할 때 아프다고 '엄살'떠는 나에게 표준어로 훈계하듯 말을 하던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해녀 할망을 보고 제주어로 한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간호사가 어렸을 때, 간호사의 할망과 해녀 할망이 같은 동네에 사셨단다. 그 동네에 놀러 가면 해녀 할망께 용돈도 받아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이었다. 간호사 일을 하는 자신을 보며 해녀 할망은 흐뭇해하셨다고. 표준어로 말하면 해녀 할망이 못 알아들으셔서 제주어로 말했단다. 간호사는 자신의 할망이 살아계셨더라면 본인을 보고 무척 기뻐하셨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지난 5월의 그 병실에서는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도 오가고, 음식도 오가고, 정도 오갔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려 신생아라 불렸지만, 나는 정말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신생아가 맞았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병실 식구들에 비하면, 내 인생사는 정말 엄살떨 거리조차 안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의 불행으로 행복감을 느끼거나 내 상황을 위로받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남을 배려하는 병실 식구들을 보면서, 나의 나약함과 개인주의를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삶에 대한 태도도 좀 더 유연해지고 강해져서 신생아 티를 벗어나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다시 내 손목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었는데, 손목만 부러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치지 않도록 행동도 더 조심하게 되었다.


해녀 할망을 뒤로하고 철부지 같았던 신생아는 좀 더 자란 어린아이로 병실을 나섰다. 병실에서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바라보던 해넘이의 그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지금은 본인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열심히 생활하시는 병실 식구들. 그분들께 감사를 전하며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해 본다.



[커버이미지 출처:픽사베이(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