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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봄 Oct 22. 2024

워케이션... 엄빠는 좋아?

여행 3일차 -1 @ 양양 휴휴암

3일차의 아침은 밝았지만,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와이프는 아침형 인간이자 얼리버드, 하지만, 

나와 딸은 야행성, 여행까지 왔으니 더 늦잠파. 

그래서 나와 딸이 늦게까지 늦잠을 잔 터. 

와이프는 6시에 일어나 리조트 산책을 해도 자고 있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나서도 자고 있고, 

깨워도 깨워도 안 일어나고 자고 있으니... 

와이프의 짜증을 듣자마자 나와 딸은 서둘러 일어나, 

억지텐션으로 짐을 싸서 차로 옮기는 수밖에... 

여행까지 와서 그럴 순 없으니 와이프도 짜증을 풀었다. 

여행의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ㅋㅋㅋ 


어젯밤에 정한 오늘의 계획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다른 숙소로 옮겨보자는 것. 

우리 가족 국내 여행은 대충 이런 식이다. 

어디로 가자만 정해놓고, 가다가 식당 정해서 밥 먹고, 

가다가 숙소를 정하고, 가다가 일정이 바뀌기도 하고, 

마땅치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이번에는 2일간으로는 동해안을 다 못 담았기도 하고,

일상 탈출의 기운이 아직 몸에 다 안 찼기도 했어서다. 


그래서, 우선 차를 타고, 여유 있는 시선으로 출발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번 여름 동해안의 날씨는 

여행 내내 ‘찌는 듯한 더움’이었다. 초등학교 때 밀린 

방학 숙제를 하듯, 매일 날씨를 '너무 더움'이라고 

적어도 이상할 게 없을 날씨. 하지만 여행을 오면 

날씨 따위가 어딜 우리를 방해해? 모드여야 한다. 


우리는 먼저, 휴휴암으로 향했다. 

나는 한 4-5번은 온 거 같다. 익숙할 지경이다. 

@ 양양 휴휴암 (자체 촬영)

이곳을 처음 왔을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광고 촬영을 위해 한겨울에 찾아왔던 곳. 

한밤중에 서울을 출발해 새벽에 휴휴암에 도착해서,

일출과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촬영을 했던 기억.


'이야… 이런 데가 있었어?' 

내가 수평선을 거의 마주하듯 바라볼 수 있는 곳,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

너무 추워서 겨울 아닌 계절에 다시 오고 싶던 곳. 

그래서, 그 후로 가족과 한 번, 부모님 모시고 한 번, 

그렇게 몇 번 더 오게 된 곳이 되었다. 


" 또또야, 여기는 와봤지? 기억 안 나? 

또또가 여기서 바닷소리도 찍고 그랬잖아."


"그 영상은 봤어."

 

"여기 어때? 특이하지?"


"뭐가?"


"아빠는 처음에 절이 꼭 산에만 있는 건 아니구나, 

그래, 불교 신자가 바다로도 갈 수 있구나... 싶었고, 

또 하나,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던 게 있어?"


"고기들 많은 거?"


"어 맞아, 그런데 그게 왜 그런지 알아?  

여기는 봉양을 치어로 한대. 어린 물고기 알지, 치어?"


"그래서 고기들이 많은 거야?"


"그렇지. 사람들이 봉양으로 치어를 보내주고,

거기에 또 정성스레 먹이를 엄청 주니까." 

@ 양양 휴휴암 (자체 촬영)

휴휴암은 내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곳이었다. 

휴휴암 발음은 '쉴 휴'가 두 번 연달아 강조하면서도,

고단한 인생 끝에 휴휴~ 내뱉는 한숨처럼 들렸다. 

이름 자체가 내게 그 자리에 한 번 앉아서 숨을 고르고,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봐야 할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가끔 한 번씩 부딪힐 때마다 

잠시 숨을 고르게 하고, 잠시 쉬며 생각하게 하는 

곳이 있거나,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근사한 인생일까. 


그리고, 갈 때마다 머릿속으로 사진 한 장을 찍는다. 

발 밑으로 파도가 치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 아무도 없이 혼자 우뚝 서 있는 상상,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사람들을 지우고, 

소리를 지우고, 시간을 지워두고, 

마치 새처럼 내 시선을 공중으로 띄워서 찰칵!

드넓은 바닷속에 나는 너무 작을 테지만, 

쭈그러져있지도, 과잉 감정에 차있지도 않고,

그저 측은하고, 자랑스럽고, 미련하고, 뿌듯한

그대로 겸허하면서도 단단한 사람으로 느껴지도록...

각자의 이유로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혼자만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릿속에 떠오른 그 사진 한 장을 찰칵 찍어두고 

번잡한 그 속세 사이에서도 꺼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도 가만히 그 사진을 떠올릴 때 

입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소리는 

"휴~ 휴~"일 것이다. 나는 그랬다. 


@ 양양 휴휴암 지혜의 불상 (자체 촬영)

다시 언덕을 올라 '지혜의 불상'을 만났다. 

처음 왔을 때에도 이 불상이 있었나 싶지만...


우리 가족은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신자인 장모님의 영향으로 와이프는 절에만 가면

천 원씩 봉양을 하곤 했다. 나는 예외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또또에게 뭔가 의지를 보여주고자 

거금 만원을 시주함에 넣고, 온 가족이 절을 했다. 


"우와, 아빠가 넣었어. 또또 잘 봐둬."


와이프가 내 의도를 눈치해며 말했다. 


"우리 또또, 이제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야 되니까 

필요한 지혜를 잔뜩 주세요 했어. 근데, 또또는 

어떤 지혜를 갖고 싶어?"


하지만, 딸은 답이 없었다. 더위에 넋이 빠졌다. 

질문과 대답을 찬찬히 할 수도 없는 날씨였다.

차로 피신해야만 하는 날씨. 


양양에서 속초로 해안 도로를 찾아 드라이브를 하며

볼거리를 즐기려는 계획. 작년 봄의 제주 해안도로의 

추억을 재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동해안도 식후경", 점심 식사가 먼저였다. 


"어? 오빠, 여기 데스커가 있네."


와이프가 뭔가 발견한 듯 말을 건넸다. 

 

"어디? 맞네. 저기가 거긴가 보다. 워케이션..."

 

"2군데인데?"

 

"어, 그러네. 저기는 숙소고, 여기가 사무실인가 보네. 

여기서 일하고 저기 가서 자고 그런가 봐. 

우리 회사 광고주라 몇 팀이 여기 와서 낮에 일도 하고 

서핑도 배우고 그랬나 보더라고."


"아빠, 근데 워케이션이 뭐야?"

 

"일 Work와 베케이션 Vacation의 합성어야. 

일도 하고, 휴가도 보내는 거야. 

한 5일 동안 여기 와서 낮에 모여서 일하고, 

시간 날 때마다 동해를 휴가처럼 즐기는 거지. 

얼마나 좋아?"


"뭐가 좋아?"


"일하는 장소와 환경만 바뀌어도 

기분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거지. 

근사한 휴가지에서 서핑도 보이는 데서 일하면, 

해외 근무지, 외국 회사 다니는 기분 들 거 같지 않아?"


"......"


"자기야, 자기네 회사도 워크숍 같은 거를 이런 데서 

해야 되는 거야. 그러면 하루 이틀만 해도 다를걸. 

오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오면 그냥 대충 회의하고 

술 때려먹는 거 하고는 완전 다른 거 같던데…."


엄마아빠는 번갈아가며 워케이션의 장점과 

그조차 없는 지금 회사를 원망하고 있을 때쯤, 


"엄빠는 그게 좋아, 진짜?" 


또또의 한 마디, 질문이라기보다 반문이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보다. 


여행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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