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나만의 기준
나는 지금 ‘카뮈’라는 말괄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본가에는 망망라는 점잖은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중도라는 점을 알아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카뮈를 키우기 전 ‘개파’와 ‘고양이파’를 나누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개파’의 전형은 털털함, 솔직함, 편안함이었고,
‘고양이파’의 전형은 내향적, 자신만의 세계가 있음, 속을 알 수 없음이었다.
왜 ‘개파’를 표현하는 것은 간단한데 ‘고양이파’를 표현하는 것은 문장이 될까.
아무튼 나는 ‘개파’인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랑 친한 사람들,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주로 ‘개파’였다.
일단 ‘개파’같은 느낌이 온다. 사람이 개 같다. 좋은 의미에서 개 같다.
이러나저러나 그들이 ‘개파’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내가 묻기 때문이다.
그럼 ‘개파’라는 대답이 나오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개가 짱이지.”라고 대답을 하고 내가 생각해 온 ‘개파’와 ‘고양이파’의 분류에 확신을 더한다.
그러면서 ‘고양이파’라고 대답을 하면 속으로 ‘역시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하고 “고양이 귀엽지!”라고 얼렁뚱땅 대답을 하고 넘긴다.
남자를 볼 때도 그랬다.
마치 종교, 정치색 마냥 개파, 고양이파를 나누고 고양이파는 절대 안 만날 거라고 다짐했다.
어쩌다 이런 걸로 사람을 나누게 됐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런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니.
우리 동생도 나의 이런 파벌 분류에 세뇌가 되었는지 구분을 하는 걸 가끔 본 거 같은데 (아님 댓글 달아줘) 그래서 그런지 고양이를 키우는 내가 어색하다고 했던 거 같다.
나도 어색하긴 하다.
그럼에도 우리 집 고양이 카뮈는 귀엽다.
사실 카뮈는 개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중을 나와있고, 이름을 부르면 달려온다.
간식을 두고 '손'을 외치면 귀여운 사자발같이 생긴 앞발을 내 손위에 올려준다.
카뮈를 데려올 때는 얌전하고 시크한, 언니 같은 고양이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주인성향 따라가는 것 같다.
나는 오두방정을 떤다. 그래서 카뮈도 이렇게 난리를 직이는 개 같은 주인의 개 같은 고양이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양이마저 개같이 물들이는 나를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무채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다른 색까지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어떤 무언가일지도.. 일단 흰색은 아닌 거 같은데 검은색이라고 하기엔 너무 악해 보이니 그렇게 적기는 싫다. (이것도 편견인가.)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나는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를 열창하면서 왔다.
출근곡으로 아주 딱이다.
울지는 않았다.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아무튼 오늘 글은 좀 중구난방인데 변명을 하자면 이번 주가 너무 다이내믹했다. 그래서 어느 하나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역시 나는 다이나믹부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