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마당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 부문 선정작품

by 박정옥


마당이라면 흔히 집채에 속한 반반한 터를 생각하지만 내 기억 속엔 또 다른 마당이 있다. 논과 밭 가까이 낮은 언덕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천수답에 가까웠던 전답을 위해서 만든 못이다. 저수지 옆에는 그보다 더 작은 마당이 있었다. 이 들마당을 떠올리면 푸른 심줄이 튀어나온 장딴지와 구릿빛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리던 아버지 생각이 난다. 겨우내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뭇 생명과 푸릇푸릇한 새싹이 봄소식을 전하면 들마당을 향한 아버지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봄이 농익어 갈 때쯤 푸른 보리도 바람과 햇살을 빌려 색을 바꾸며 탱글탱글 탐스러운 알갱이를 만든다. 망종이 다가오면 온 들판이 초록으로 무성한데 유독 보리만이 수염을 빳빳이 세우고 황금 같은 찬란한 금빛을 뽐낸다. 보릿고개를 아는 듯 ‘곤궁한 사람을 구하러 왔노라.’ 하고 외치듯이 출렁인다. 이때쯤 어른들은 무성히 자란 잡초를 베어내고 돌을 골라내며 마당을 다듬는다. 겨우내 얼어서 퍼석해진 흙도 자근자근 밟아주고 파인 곳은 황토를 넣어 단단하고 매끄럽게 전체를 다져준다. 여러 날을 정성을 다해 다듬어서 단단해지게 한다.

보리가 뜨거운 볕에 까슬거리는 수염을 비비며 바싹바싹 말라갈 때 어른들은 숫돌에 시퍼렇게 간 낫으로 보리를 벤다. 베어낸 보리는 적당량을 단으로 묶어서 말린 다음 타작한다. 마당이 첫 일을 시작하는 날이다. 가장자리에는 금빛 보릿대가 쌓여있고 중앙에 한 아름씩 보릿단을 놓고 도리깨로 때린다. 기름한 작대기 끝에 물푸레나무로 서너 개의 휘추리를 휘휘 돌아가게 달아놓은 도리깨는 보리나 콩의 낱알을 털어내는 최고의 농기구라 할 수 있었다. “털썩털썩” 도리깨가 매질할 때마다 알갱이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유월의 짱짱한 해와 보리 가시랭이가 부모님의 몸에 끈적끈적 붙어서 숨쉬기조차 힘들 때도 오히려 당신들은 “어 이!”하고 추임새를 넣어가며 박자를 맞추어 알곡을 털어낸다. 추임새 덕분인지 도리깨질에 더 힘이 들어간다. “털썩! 털썩!” 도리깨질이 쉬워 보여 나도 휙휙 휘둘러봤지만, 보리가 아닌 내 뒤통수만 눈물 나게 때리곤 했다.

타작마당에 해가 지기 전에 그날 타작을 마친다. 빈 보릿단은 구석으로 치우고 갈고리로 보리 지푸라기를 긁어내고 나면 마당엔 알곡이 누렇게 쌓여있다. 어른들은 해가 지면 바람이 자러 간다고 서둘렀다. 바람의 힘을 빌린 엄마의 보리 디루는 솜씨는 신기하기만 했다. 나무로 만든 바가지에 보리를 가득 담아 키 높이만큼 올려서 살살 흩뿌리면 검불과 가시랭이는 타작마당 밖으로 날려 나가고 알곡은 수직으로 떨어졌다.

엄마가 보리를 디루는 동안 나는 타작마당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이삭을 부지런히 주워서 낡은 양동이에 담았다. 엄마는 내가 주운 이삭은 따로 모아두었다가 용돈으로 바꾸어 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용돈을 모으는 재미에 힘들어도 논밭이나 마당에서 이삭 줍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들마당은 보리타작이란 큰일을 무사히 마친 셈이다. 집에서 타작할 때도 있었지만 들마당 덕분에 온 집안에 먼지를 날리지 않고 타작할 수 있어 좋았다.

보리타작을 마친 마당은 잠시 쉬었다가 참깨와 들깨 단에 그 품을 내어준다. 보리처럼 요란스럽지는 않아도 마당 가장자리에서 풋풋한 잎들을 말린 깻단들은 마당 위에 깔린 천막 천 위에서 “토닥토닥” 막대를 맞으며 알곡을 털어낸다. 마당은 그저 누구든 품 안에 들기만 하면 다 품었다.

농부의 계절은 빠르기만 했다. 깻단을 품고 고소한 맛을 꿈꾸었던 그 마당엔 콩꼬투리가 조롱조롱 달린 콩대가 다닥다닥 붙어서 누워있다. 콩은 누가 건들지 않는데도 혼자서 탁! 하고 꼬투리를 열고 콩알을 쏘아 올리기도 한다. 그때쯤 여지없이 콩도 보리처럼 도리깨 타작을 당한다. 콩의 성질은 불같아서 도리깨에 맞고 나면 온 마당을 튀어 다닌다. 튀기만 잘하는 게 아니고 달리기도 얼마나 잘하는 철부지인지, 두부나 된장이 되기까지 수없이 어르고 달래야 밥상에 오른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 때 들판은 또다시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타작마당이 할 마지막 일이 남아있다. 저 황금 들판을 품으로 끌어안는 일이다. 농부들은 마당을 다시 한번 다독인다. 튀어나온 돌들을 골라내고 마당 안쪽으로 발을 내민 풀도 뽑고 가장자리에 크게 자란 망초나 쑥부쟁이도 가차 없이 잘라 버린다.

들마당 가장자리 빼곡히 볏단이 쌓이고 창고에 잘 보관해 두었던 탈곡기가 들판으로 나와 타작마당에 자리 잡는다. 대여섯 사람이 힘을 합해 탈곡을 시작한다. 볏단을 옮기는 사람, 탈곡기를 열심히 밟으면서 낱알을 터는 사람, 짚단을 정리하는 사람, 가마니에 알곡을 퍼 담는 사람 등 일꾼이 많을수록 좋은 날이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고성, “와롱 와롱 와롱!”있는 힘을 다해 탈곡기가 내뿜는 가쁜 숨소리에도 마당은 풍요로운 가을걷이가 좋기만 했을 것 같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들마당은 온전하게 터를 내주었다. 봄날, 뱀딸기가 샛노란 꽃을 피우며 빨간 열매를 맺을 수 있게 귀퉁이를 내어주고, 폭우로 쏟아지는 장맛비가 저수지로 가는 물길도 내어주었다. 타작마당일 땐 곡식과 함께 도리깨로 한없이 맞기도 하고, 토닥토닥 깻단과 속삭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나락을 터는 난장판까지 말없이 받아주고는 황량하게 겨울잠에 들어가서 다음 해 봄을 꿈꾸었다.

이제 고향 들판엔 보리나 벼 대신 유실수가 더 많고 저수지와 타작마당이 있던 곳에는 전원주택의 예쁜 마당이 들어섰다.

돌아보면 아버지의 일생도 우리 가족의 타작마당이었다.

먼 길 떠난 그리운 아버지가 꿈에 오신다면 나는 흰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염색하고 재잘재잘 어리광을 부릴 것이다.

“아부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 부문 선정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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