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by 박정옥

박정옥


서울에서 장맛비를 헤집고 한나절 걸려서 하동으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향토색 짙은 감성에 마음이 설렜다. 운무와 풀빛에 취한 듯한 섬진강은 푸르디푸른 빛을 안고 잠잠히 흐르고 있었다. 국도를 벗어나 지방도를 따라 가파른 화개면 부춘리 산속으로 들어갔다. 3년 만에 가는 길이라 ‘이렇게 깊은 산중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산사가 보였다.

오솔길 옆으로 산야초들이 소박하게 피어있고 아리잠직한 풀꽃들이 나를 반기는 것 같다. 모두 내가 좋아하고 그리웠던 태깔들이다.

“콸콸” 제법 큰 물소리 내면서 흐르는 계곡을 건너면 속세와 동떨어진 산사에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이나 4대 천황은 없지만 누가 봐도 여법한 산사가 분명하다. 오히려 없는 것이 많아서 더 아늑하고 신심 나는 곳이다. 때마침 마당 귀퉁이 차 방에 계신 스님께 인사를 하고 안내받은 방에 짐을 풀었다.

절에 오면 전각殿閣만 바라봐도 마음이 편안하다. 멋들어진 기와지붕과 웅장한 기둥, 기둥에 새겨진 주련柱聯, 꽃살문이 단번에 마음의 경계를 풀어놓는다. 크게 날숨 한번 쉬고 하늘을 본다. 푸른 산과 높은 하늘 사이로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 날렵하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향해있다. 마당 구석구석에는 빨강과 분홍으로 한창 돌담을 물들이고 있는 봉선화가 수줍어하고 향기를 뽐내던 백합은 순백의 꽃잎으로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절집 식구들과 정갈하고 맛 나는 저녁을 먹은 후 우전차 한잔으로 가벼운 담소를 하는데 어느덧 산사에는 침묵처럼 어둠이 내려앉았다. 머물고 싶은 소중한 시공간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고양이 걸음으로 경내를 산책하다 방으로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깊은 어둠에 잠겼는데 보이지 않는 소리 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은 간간이 바람과 함께 “댕그랑댕그랑”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주고받는다. 객사 바로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계곡물은 아마 밤을 지새울 듯하다. 한 줌 빛을 보고 달려들던 나방과 하루살이,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서까래 끝에 매달려있던 거미까지도 살그머니 움직이다가 깊이 잠들 때 나도 눈을 감았다.

세찬 빗소리 때문에 눈을 비비고 한지 바른 격자무늬 문을 열었다. 덧문인 유리문까지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뿌연 여명을 이고 기왓골 끝에서 떨어진 낙숫물이 정교하고 동그란 무늬가 되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한참을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보슬보슬 내려서 땅속으로 스며든 비와 세찬 물기둥으로 떨어지면서 “퐁퐁” 작은 풍선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는 비는 같은 물이다. 그들의 시작과 끝은 같은 곳인데 볼 때는 다 다른 모습으로 보일 뿐이구나. 인생처럼.

비가 개자 밤보다 더 조용한 절집의 아침이 눈을 떴다.

관음전에 가서 안녕을 감사하는 기도를 했다. 젊은 날에는 절에 가서 불상 앞에 넙죽 엎드려서‘바랍니다. 해주세요’만 읊었다. 반야심경 한 줄도 깊이 공부해 보지 않고. 자식을 위해 몇 년을 입시기도 하면서 천배를 하고 삼 천배도 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 때문에 부처 앞에서 미친 듯이 울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따지기도 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부처님은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픈데 왜 웃고 있냐고 온갖 푸념을 쏟아 내다보면 또 진지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처의 모습은 늘 그대로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낮은 자세로 마음을 내어놓을 때 치유가 되고 에너지가 생김을, 그 또한 기도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순서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드잡이한다. 원망보단 연민과 후회들이 ‘그때 그랬지’ 하면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칼을 들이댄다. 이 감정들을 완전히 비우는 일은 어렵지만, 절에 와서 나의 내면을 꺼내서 들여다보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구정물 항아리에 맑은 물이 한 방울씩만 떨어져도 끝내 그 항아리가 맑은 물로 가득 찰 것이라는 믿음으로.

산사에서의 나의 아침은 차 한 잔과 떡 한 조각, 과일 한 알로 대신했다.

낮게 드리웠던 구름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늘은 청아하게 맑았다.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나긴 했지만, 가장자리에서 발을 담그기엔 그만인 물살이다. 바짓단을 걷고 바윗돌에 앉아서 물속으로 살며시 발을 담갔다. 차다. 시린 전율이 온몸으로 전해온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느낌표 모양 같은 작은 물고기 떼들이 순식간에 나의 발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간질간질! 발등을 깨문다.

바람도 없는데, 계곡 쪽으로 뻗고 있던 나무에서 작고 메마른 가지 하나가 “툭”하고 물속에 떨어졌다. 놀란 물고기 떼들은 파르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나뭇가지는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아무 일도 아닌 듯 떠내려갔다.

바위와 돌 사이로 “꼴 꼴” 소리 내며 웅덩이로 뛰어들던 물줄기가 하얀 거품을 끊임없이 뿜어낸다. 이 물은 새벽녘 소나기도 품고 있겠지. 계곡물의 여정을 생각해본다. 물은 둥글고 큰 바위나 날카롭고 뾰족한 돌을 탓하지 않는다. 버릴 것은 버리고 품을 것은 품으면서 그냥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뎅 뎅~”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물에 담긴 내 몸과 마음을 끄집어냈다.

오신채를 쓰지 않고 고기가 없는데도 절집의 된장찌개와 나물은 단맛이 났다. 공양한 그릇을 깨끗이 닦아놓고 어슬렁어슬렁 산책 후 방으로 향하는데 다실에서 스님이 부르신다. 간단한 다과상이 있고 주전자에서 찻물이 김을 올리고 있다.

“커피도 있고 봄에 덖어놓은 쑥차와 녹차도 있어요. 좋아하는 것으로…”

“쑥차를 마시겠습니다.”

하루 한 끼만 드시는 스님은 다과 대신 직접 구우신 소금 한 꼬집을 입 안에 넣고 맹물을 마셨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각자 상황에 맞는 것을 취하면 된다는 맑은 물 한 방울 같은 법문을 해 주셨다.

쉼의 마지막 밤이 왔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검푸른 밤하늘엔 빛 찬란한 별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곳에선 별과 바람, 물과 물고기, 돌과 나무들까지 모두가 하나고 하나가 모두였다.


keyword
이전 09화내 이름은 갤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