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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22. 2024

흰 토끼와 체셔 고양이


 “아, 맞다. 가문비씨도 저녁때 바비큐 파티 오세요. 동네 할머니들도 다 오기로, 오시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빠지는 사람 있으면 안 되겠죠?”


 한층 붙임성 있고 온화한 말투로 안톤이 초대의 말을 꺼냈다.


 “네, 알겠어요.”


 세 할머니가 오실 거라는 말에 문비도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그럼, 저녁때 봐요.”


 라한을 향해 말한 문비가 깨금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자리를 떴다. 그녀를 시선으로 오래 배웅하고 선 라한의 어깨를 안톤이 툭 쳤다. 


 “der Glückspilz.”


 행운아라는 말이었다. 



 바비큐 파티가 있을 저녁 무렵이 되려면 아직 멀었고 요사이 문비에게 한낮의 밝은 햇살은 전에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좋은 자연조명을 낭비하기 싫어서 문비는 창가의 책상에 앉아 그동안 그린 식물화들을 꺼냈다. 


 책에 들어갈 그림과 개인적인 작업물을 나누었다. 개인적인 작업물은 따로 넣어두고 책에 들어갈 그림을 한 장 한 장 다시 점검하고 목차에 따라 정리했다. 흰 도화지 위 초록의 풀에, 색색의 꽃에, 알알이 영근 열매에 그녀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녹아들어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그림 작업, 마지막으로 눈에 청명하게 담은 계절일지 모를 봄 혹은 여름 혹은 가을.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기는커녕 그것이 그림인지조차 모를 날이. 


 한숨을 짓던 문비는 진동음에 흠칫 놀라 옆에 둔 핸드폰을 본다. 할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일전의 곤혹스러웠던 통화가 떠올라 문비는 선뜻 전화를 받지 못한다. 


 네 아버지 병에 대해 너도 안다던데? 

 알아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나는 참 모르겠구나. 알면서 그렇게 가만히 있어진다니? 

 …….

 만나 봤으니 너도 저간의 사정을 다 알았겠지만 네 아버지가 널 안 보고 산 게 아니라 새중간에서 네 엄마가 고집을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못 보고 산 거였잖니? 혼자서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 텐데, 얼마나 그리워했을 텐데. 넌 꼭 그렇게 아버지한테 모질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니?

 ……. 

 얘야, 문비야. 듣고 있니? 

 네. 

 내가 너였으면 절대로 그렇게 가만 못 있었을…… 아니다. 휴우, 측은한 내 아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내 아들만 측은하지. 


 할머니가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문비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망연히 듣고만 있었다. 


 비슷한 통화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문비는 진동하는 핸드폰을 한사코 외면한다. 마침내 진동음이 그치자 문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제야 깨닫는다. 걸려온 전화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림이었다. 무의식중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흰 토끼였다. 메모지에 그린 토끼는 손에 든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저 조바심치는 다급한 표정이라니. 어린 시절 에니메이션으로 보았던 흰 토끼의 대사 한 마디가 귓가에 선연하다. 


 ‘바쁘다 바빠!’


 멍하니 있다 정신 차려 보니 시계를 든 토끼를 그리고 있었던 적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문비는 차마 토끼를 구겨 버릴 수 없어서 손닿는 데 있던 책의 갈피에 아무렇게나 넣고 덮어 버린다. 


 왜 하필 토끼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문비가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체셔고양이였는데.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렸지, 라는 체셔고양이의 말을 가장 좋아했는데. 


 핸드폰이 다시 진동한다. 메시지 수신 알림이었다. 열어 보니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첨부된 문자메시지, 보낸 사람은 고모였다. 지난 번 제주도에서 본 이후로 고모는 이렇게 가끔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고모의 메시지는 대개 담백하고 다감했고, 가끔은 엉뚱하고 재미있었다. 


 - 네 엄마 대학 3학년, 나 2학년. 봉사활동 동아리 봄 야유회. 이날 네 엄마가 남긴 명언은 ‘내기는 짧고 벌칙은 길다’였고. 학기 끝날 때까지의 동아리방 청소를 걸고 개최된 학년 대항 신발 날리기 대회에서 네 엄마는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단다. 긴 벌칙은 우리 2학년에게 돌아왔지. 내가 대표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 


 사진 속 엄마는 막 신발을 날린 참이어서 한 발을 앞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뒤축 꺾인 운동화. 운동화를 보고 있는 엄마의 앳되고 환하고 자신만만한 미소.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 엄마를 문비는 살갑게 그리고 조금은 서먹하게 오래 들여다본다. 그러는 사이 해가 서산머리에 가 걸리고 주위를 둘러싼 빛은 한층 나긋하고 순해졌다. 


 문비는 책상을 치우고 일어났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라한의 집으로 가려는 거였다. 할머니들까지 모시고 바비큐 파티를 할 예정이라면 준비가 간단치는 않을 터였다. 미리 가서 은성을 돕고 싶었다. 


 마땅히 들고 갈 것이 없는 문비는 채선 이모가 가져다 놓은 와인 가운데 바비큐와 어울릴 법한 레드와인 한 병을 골라잡았다. 


 막상 가 보니 은성은 보이지 않고 라한과 안톤만 주방과 마당을 오가며 분주했다. 


 “은성 언니는요?”


 라한을 붙잡고 물었더니.


 “방에 있어요. 들어가 봐요.”


 은성은 침대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었다. 


 “어서 와. 문비씨가 일찍 와 줘서 다행이야. 둘이 다 알아서 한다고 날더러 손 하나 까딱하지 말라는 거야.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데 괜히 옆에서 얼쩡거리기도 민망하고 해서 방으로 들어왔지. 어떻게 제대로들 준비하고 있는 거 같아?”


 반갑게 웃으며 은성이 물었다. 영 마음이 안 놓이는 눈치였다. 


 “얼핏 보기에는 잘들 하고 있는 거 같았어요.”


 “하긴, 좀 엉성하면 어때. 그건 또 그것대로 재미지 뭐.”


 “근데요, 언니. 안톤이라는 사람, 바비큐 그릴 세팅하는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고 엄숙한지 장인 정신 충만한 조선시대 도공도 울고 가겠던데요?”


 문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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