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May 24. 2024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림


 “정말?”


 은성이 눈을 크게 떴다. 홀씨처럼 날아온 웃음이 은성의 얼굴에서도 꽃피었다. 두 여자의 웃음소리가 샘물 솟듯 퐁퐁 솟았다. 맑고 가벼운 웃음, 정말 웃음다운 웃음, 오직 웃음 그 자체인 웃음을 맘껏 웃으면서 은성은 그 소중함을 생각했다. 


 자신이 잘 웃는 사람임을 은성은 문비를 만나고 나서 알았다. 같이 웃는 웃음을 따라 혼자 웃는 웃음도 늘었다. 이곳의 자연에는 웃음을 부르는 작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으므로. 


 “은성 언니, 그거 알아요?”


 한참 웃던 문비가 무슨 발견이라도 한 듯이 물었다. 


 “뭐 말이야?”


 또 무슨 재미난 얘기를 하려나 싶어 은성은 솔깃하여 귀를 기울였다. 


 “언니의 웃음이 참 예쁘다는 거요.”


 “아이, 무슨. 누구든지 웃으면 다 보기 좋지 뭐.”


 은성이 손사래를 쳤다. 쑥스러워하며 두 손으로 가린 뺨에 홍조가 고왔다. 사실 은성은 어제도 같은 말을 들은 터였다. 


 낯을 가리는 편인 은성은 어제 안톤을 처음 봤을 때도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짧게 인사만 하고는 방으로 피신하다시피 들어가 버렸다. 은성이 방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안톤이 노크를 하고 은성의 이름을 불렀다. 은성은 문을 열지 않고 ‘네?’하고 대답했다. 


 안톤이 헛기침을 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으로 시작하는, 은성이 열 번도 넘게 보았던 에니메이션에 나오는 노래였다. 안톤의 노래는 코믹하고 밝고 훌륭했다. 


 그의 재치와 정성에 마음이 움직인 은성이 얼굴만 빼꼼 내밀었을 때도 노래는 계속되었다. ‘or ride our bike around the halls?’라고 노래하면서 안톤은 아주 웃긴 표정을 짓고 뒤뚱뒤뚱 자전거 타는 시늉을 했다. 


 마침내 은성이 풋 웃었고 안톤은 환호했다. 와아 예쁜 웃음, 이라고. 은성은 예의상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예사롭게 넘겼었다. 그런데 지금 문비에게서 같은 말을 듣자 쑥스러움이 뒤미처 밀려들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야외 모임이랑 바비큐를 많이 한다나 봐.”


 은성은 라한에게서 들은 말을 꺼내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여기는 남의 집이니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을 텐데 어떨까 모르겠어. 안톤이 바비큐 그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은 것도 뭔가 낯설고 손에 익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었을까?”


 그 표정에 얽힌 비밀은, 비밀이랄 것까지도 없지만, 바비큐 파티 중에 풀렸다. 


 “진짜라니까요.”


 한실댁과 내앞댁, 흰돌댁 앞의 접시들에 갓 구운 고기와 소시지를 놓으면서 안톤이 예의 유쾌한 미소를 띤 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네 마을에서는 바비큐를 잘하는 남자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외할아버지 바비큐 실력이 가장 좋아서 바비큐 마이스터라고 불렸고, 마을 청년들에게 바비큐 가르쳤다고 합니다.”


 세 할머니가 웃은 것은 안톤의 말투와 제스처가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들은 내심 바비큐인지 뭔지 그냥 숯불 위에 석쇠 놓고 고기 얹어 구우면 되는 건데 고작 그 숯불구이 잘한다고 인기씩이나, 하는 생각들이 없지 않았다. 


 안톤의 말에 긴가민가하기는 은성과 문비도 마찬가지였다. 바비큐를 가르치고 배우고 했다는 소리를 믿어야 하나? 은성의 눈빛에 문비도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사실일 걸요.”


 라한이 안톤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안톤을 보세요. 그릴 다룰 때와 고기 구울 때만큼은 다른 때와 달리 점잖고 신중하잖아요. 외할아버지께 그렇게 배웠대요.”


 과연 그렇기는 했다. 그릴 앞에 있지 않을 때의 안톤은 줄곧 미소나 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릴 앞에만 가면 근엄해졌다. 


 “그래, 사람이란 백인백색이니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


 흰돌댁이 융통성 있는 의견을 내자 내앞댁과 한실댁도 그거는 그렇지, 없으란 법 없지, 하고 차례로 수긍했다. 문비와 은성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이 백인백색? 무슨 말입니까?”


 할머니들의 맞은편에 앉은 안톤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끔벅거렸다. 


 “사람이 백 명이 있다 치면 그 백 명이 다 하나하나 다르다 그 말이지.”


 알아듣기 좋으라고 천천히 뚝 뚝 끊어서 흰돌댁이 대답했다. 


 “아아 네, 알겠어요. 설명 고맙습니다. 흰돌댁 할머니, 좋은 한국어 선생님입니다.”


 안톤의 칭찬에 흰돌댁은 기분이 좋았다. 내앞댁과 한실댁도 안톤의 친화력과 서글서글한 태도를 높이 샀다. 


 “자자, 독일 청년. 이거 한 번 마셔 보게. 포도주하고 비슷한 거여. 머루주라고.”


 흰돌댁이 자신이 직접 빚은 머루주를 따라 주었다. 맛을 본 안톤은 정말 맛있는 코리안 와인이라고 감탄했다. 


 “그럼 이것도 한 번 먹어 보게. 내가 만든 인절미야.”


 내앞댁이 젓가락으로 떡을 집어 내밀었다. 안톤은 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찰진 식감에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했으나 역시 맛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자 이것도 한 번 맛을 보게. 도토리묵이야.”


 한실댁이 직접 쑤어 가져온 도토리묵을 권했다. 안톤의 젓가락질이 서툴다 보니 묵은 젓가락 끝에서 부서지기만 하고 집어지지가 않았다. 한실댁이 숟가락으로 먹어도 된다고 숟가락을 건넸다. 


 이제야 겨우 한 점의 도토리묵을 입에 넣은 안톤은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양념하지 않은 도토리묵, 처음 먹어보는 안톤이 그 맛을 알기는 어려울 수밖에. 뭉그러지는 느낌과 쌉싸래한 맛은 세고 그 아래 숨은 고소함은 은은하니까. 


 그릴에서는 불그레한 숯불이 꽃처럼 피었다 스러지고 거기 묻어 놓은 감자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떠다녔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연령과 성별과 국적을 초월하여 친근하고 즐거웠다. 


 청량한 밤기운, 온화한 사람들. 문비는 가슴속에 또 하나의 풍경화를 새겨 넣었다. 실체가 없기에 지워지거나 색 바랠 염려가 없는, 언제나 사람으로 완성되는 풍경화.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림. 


이전 08화 흰 토끼와 체셔 고양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