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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29. 2024

완벽하게 행복하고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저런, 고운 뺨에 서리 녹은 물이 묻었네.”


 한실댁이 외투 소매를 뒤집어 문비의 얼굴을 부드럽게 닦았다. 물방울이 내려앉아도 하필 눈물로 보일 자리에 내려앉은 것이 보기에 잔망스러웠다. 


 “요즘은 즉석 사진기로 사진 찍는 걸 통 못 보겠더구나. 사진기가 고장이라도 난 게야?”


 “고장난 건 아니고요. 그냥…… 눈으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대답하면서 문비는 심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음 뒤에 숨긴 말이 마음속에서 어지러이 맴을 돈다.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 자신을 위해 찍는 것이었는데 결국 저만 볼 수 없는 사진이 되어 버릴 텐데요. 그야말로 부질없지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니냐?”


 한실댁도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않는다. 요즘 들어 네 눈에서 왜 자꾸 허망한 빛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 늙은이는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리는구나. 늙은이가 눈이 어두워 잘못 본 것이면 좋으련만.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해도 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생각, 하면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는 생각들. 


 “고욤나무가 끝 그림이라고 했지? 그럼 곧 네 집으로 돌아가겠구나.”


 말하다 보니 벌써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한실댁은 공연히 고욤 광주리를 흔들었다. 섞여 들어간 마른 이파리들을 골라낼 것도 아니면서. 


 “이곳에서 보낸 올해의 봄, 여름, 가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이지 특별한 계절들이었다. 엄마를 보낸 슬픔과 애도의 계절들, 뜻하지 않은 비밀과 시련을 직면한 계절들. 그러나 한없이 봄답고, 여름답고, 가을다웠던 숲속의 계절들. 새순과 새잎을, 꽃들과 큰물이 진 개울을, 여무는 열매와 지는 잎을 함께 보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가 결연히 사랑이라 믿는 한 남자를 빼놓을 수 없는 그 계절들. 


 * * * 


 남 교수의 책에 들어갈 그림을 다 완성한 문비는 짐을 챙겨 도시의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사흘 뒤로 확정되어 있었다. 집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기에 문비는 이틀 동안 꽤 바빴다. 


 신우의 로펌을 방문하고,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가서 김소현 복지사를 만나고, 병원에 가 티거 의사에게 진료도 받았다. 채선 이모네에도 들렀다. 남 교수와 수필집에 대한 의논을 매듭짓고 모처럼 집에 온 신우까지 넷이 둘러앉아 저녁도 먹었다. 


 여행 전날은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엄마의 옷과 물건들을 정리했다. 기증할 수 있는 것들과 버릴 것들과 남겨둘 것들을 선별하는 문비의 손길은 과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수첩이나 다이어리, 노트 같은 것은 일단 남겨둘 것으로 분류하여 따로 마련한 상자에 넣었다. 넣기 전에 훌훌 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도 문비는 찾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던 때를 즈음하여 엄마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초를.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도 모르면서. 


 끝내 별 소득이 없었다. 일정이나 연락처 메모, 소비 계획이나 지출 내역 같은 것들, 점역 봉사에 관한 기록 등이 전부였다. 내밀한 일기나 글 같은 건 없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상자를 닫으려던 문비가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잠시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다가 다급한 손길로 상자 안을 뒤졌다. 문비가 꺼낸 건 주로 일정을 메모해 둔 다이어리 가운데 하나였다. 삼 년 전의 것. 


 문비는 곧장 12월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고는 11개의 숫자를 종이에 옮겨 적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당장 그 숫자를 핸드폰에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싶은 것을 문비는 애써 참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어쩐지 그 번호를 누르면 내일로 다가온 여행을 망치게 될 것 같았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자신에게 본때를 보일 것만 같았다. 닳고 닳은 속설이라 치부해 왔던 가소로운 가문비에게. 


 종이를 엄마의 책상 서랍에 넣으면서 문비는 중얼중얼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다녀와서, 다녀온 뒤에 전화를 하는 거야. 그때까지는 이런 게 있다는 것까지도 잊어 버려. 그럴 수 있지? 그래야만 해. 여행을 하는 동안은 오롯이 여행의 즐거움에만 집중하는 거야. 이 여행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서랍을 닫은 문비는 망설임 없이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일찍 잠을 청할 작정이었다. 


 오래 뒤척이기는 했지만 잠에 들고 나서는 깨지 않고 아침까지 내처 잤다. 청명한 아침이 추위와 함께 밝았다. 문비는 비교적 개운한 기운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성이던 라한이 문비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그의 얼굴도 하늘만큼이나 맑고 환했다. 그가 달려와 문비의 캐리어를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문비 투어에 불러 줘서 고맙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넣고 돌아선 라한이 문비를 향해 말했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가 싱그러웠다. 아무리 보아도 청청한 구과식물 같은 사람. 


 “문비 투어 유일의 손님 송라한씨. 한 가지만 유념해 주시면 됩니다. 미리 당부 드린 바 있다시피, 기대는 금물, 이라는 것.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죠.”


 문비가 짐짓 사무적으로 말했다. 마지막 말에는 웃음이 묻어나고 말았지만. 


 “알겠습니다.”


 라한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기대는 필요치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 하나로 이미 이 여행은 완벽하게 행복하고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여행이니까. 


 차에 타자 문비가 핸드폰에 네비게이션을 띄우고 목적지를 입력하여 운전석 앞 거치대에 놓았다. 


 눈으로 확인한 라한이 빙긋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지금 사랑에 빠진 남자. 설령 문비가 지옥으로 가는 길을 제시했더라도 기꺼이 동행할 터였다. 하물며 바다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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