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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31. 2024

꽃 그림자 어룽어룽


 살면서 타인의 옆얼굴을 이렇게 오래 싫증내지 않고 가만하게 바라본 적이 이전에는 없었다. 그럴 만한 계기나 사연도 없었고. 이 사소한 깨달음이 문비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잘 각인하여 간직하고 싶도록. 


 이토록이나 옆 사람의 기척에 온 마음이 쏠리고 휘둘렸던 적이 있었나? 전례가 없던 일, 새로운 발견, 라한은 스스로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이따금씩 옆을 돌아볼 때면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마주쳐 오는 윤채 도는 눈동자. 감미로운 반짝임, 눈이 부시도록. 


 마음과 마음이 충일하게 이어지면 말은 있어도 없어도 자연스러웠다. 담소는 담소대로 침묵은 침묵대로 평화롭고 즐거웠다. 그래서 두 연인은 들뜨고 설레면서도 편안할 수 있었다. 


 “운명을 믿어요?”


 휴게소에 들러서 산 커피를 홀짝이다 말고 문비가 물었다. 


 “글쎄요. 삶의 모든 것이 다 이미 그려진 지도를 따라 가기만 하는 거라는 차원의 운명이라면 믿지 않는 쪽인데. 문비씨는요?”


 “비슷한 생각이에요. 하지만 내 선택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닥쳐오고야 마는 어떤 일들은 분명 존재하잖아요. 그런 걸 숙명이라고들 하던가.”


 내가 유전적으로 시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 이것이야말로 숙명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지요. 나는 선택한 적이 없고, 어떤 안간힘으로도 피할 수 없어요. 문비가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라한이 자신의 눈을 볼 수 없게. 자신의 비밀이 무사할 수 있게. 


 “우연이 중첩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라한이 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요.”


 “그럼 이 경우는 어떨지? 내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게요.”


 “일단 들어 볼게요.”


 라한은 먼 이국에서 한 여자를 눈여겨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딘가의 공항이었다. 식어가는 커피를 한사코 바라보던 여자, 그 여자에게서 한때 자기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던 자신을 본 남자. 


 “그리고 그 남자는 두 달 정도 지난 시점에 그때의 그녀가 자신의 집 마당 살구꽃 아래 앉아 있는 걸 보게 된다는.”


 그날은 산들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을 따라 그녀의 얼굴 위에서 꽃 그림자가 어룽어룽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그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아릿하게 일렁였고, 그는 섬광 같은 예감에 빠졌다. 


 나는 이제껏 어느 누구를 보았던 눈과도 같지 않은 눈으로 저 여자를 오래 아주 오래 바라보겠구나, 하고. 


 “우와! 오슬로 공항! 거기서 나를 봤었다는 거잖아요?”


 커다랗게 뜬 눈에 신기하다는 빛을 띤 문비가 그날의 장면을 최대한 꼼꼼히 되짚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비의 회상에는 라한의 모습이 없었다. 


 “나는 스노카이팅을 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오슬로에서 안톤과 친구들 무리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고.”


 “난 오로라를 보러 가던 길이었죠. 엄마의 유언을 지키려고.”


 이 유언의 이유를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의 문비는 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섬망 상태에서 오로라에 관한 말을 건넸던 상대에 대해서도 추정해냈다. 짧은 평생을 오로라는 고사하고 그 어떤 빛도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이설이라는 여자였으리라고. 


 “그래서, 운명일까요? 오슬로 공항에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문비씨가 느닷없이 우리집 마당에 나타난 것 말이에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서 라한은 문비를 돌아보았다.  


 해안도로 저 멀리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녀는 이마에 손차양을 대고 있었다. 한 뼘쯤 열린 차창으로 해풍이 밀어들었다. 나부낀 머리카락이 청초한 뺨에 어지러이 흩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걸까요? 운명일까요?”


 이윽고 문비가 라한의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전히 바다를 보면서. 


 “운명인 것으로 하죠.”


 “그래요. 우리는 운명인 것으로.”


 마침내 라한의 눈을 보며 문비가 수긍했다. 만남이 운명이 되는 순간 이별도 운명에 종속된다는 순리까지도 문비는 헤아리고 있었다. 만약에 우리가 이별한다면 그것 역시 운명의 책임이라고. 


 “왜 바다냐고, 또 삼면이 바다인데 그 중에서 왜 동해냐고 끝까지 안 물어보네요?”


 “바다가 아니어도 좋지만 바다여서 좋고, 남해나 서해도 좋지만 동해 바다여서 더 좋았거든요.”


 라한은 동해 바다에 대한 희미한 추억 한 폭을 간직하고 있었다. 너댓 살 무렵이었던 것 같으나 확실치는 않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바닷가의 레스토랑에 간 기억이었다. 외관이 놀이공원의 바이킹을 닮은 목조 배 형상인 레스토랑에서 세 식구는 저녁 시간을 보냈다. 


 무얼 먹었는지는 잊었으나 라이브 무대를 빌려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의 모습을 라한은 기억한다. 무슨 노래인지는 잊었으나 사랑과 행복에 겨웠던 어머니의 젊은 얼굴을 기억한다. 


 “솔직히, 안 물어봐서 좋았어요. 대단한 이유 같은 거 없었으니까. 근데 갑자기 이유라면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올랐어요.”


 문비는 잠시 말을 끊고 차창을 닫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빗으로 대충 쓱쓱 빗어 귀 뒤로 넘겨 정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산은 매일 봤잖아요. 그래서 같이 바다를 보고 싶었고, 낙조 중에서도 동해의 낙조를 보고 싶었고, 다른 이유 한 가지는 일단 보류.”


 보류된 한 가지 이유는 고모가 보낸 사진이었다. 고모와 엄마 그리고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들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의 배경이 특이했고, 고모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문비는 그 장소를 직접 보러 갈 예정이었다. 


 “보류라고 하니까 괜히 당장 듣고 싶어지는데. 지금 말해 달라고 해도 절대 말 안할 거죠?”


 문비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별 것도 아니긴 한데, 미리 알려주면 더 별 것 아닌 게 될 거라서.”


 “자꾸 그렇게 나오니까 듣는 입장에선 궁금증만 더 커지는데. 흠…… 힌트, 힌트 없어요?”


 “없어요.”


 문비가 눈을 휘며 웃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하늘하늘한 자귀꽃 같은 것이 툭 툭 피어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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