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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03. 2024

어느 동화의 삽화


 두 사람은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동의 여정 또한 여행의 일부이니 쉬엄쉬엄 가자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달리다 잠시 머무르고 싶은 풍경을 만나면 차를 멈추고 내려 바람을 쐬었다. 그렇다 보니 점심 무렵이 한참 지나서야 두 사람은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문비가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자고 안내한 곳은 독립서점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바닷가 카페였다. 


 “샐러드와 빵으로도 괜찮죠? 저녁은 제대로 먹을 거니까.”


 카페 앞에서 문비가 물었다. 눈앞의 건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괜찮다고 대답하던 라한의 눈에 놀란 기색이 들어찼다. 


 “동해 바다를 택한 세 번째 이유예요. 이 사진이.”


 문비가 핸드폰에 띄운 사진을 라한에게 보여준다. 라한의 눈 속 놀란 빛이 더욱 짙어졌다. 


 “고모가 보내준 옛 시절 사진인데, 이 분이 결혼 전의 우리 엄마, 이 분은 고모, 그리고 친구분들이래요.”


 “그러니까 그 옛날 문비씨 어머니와 고모님이 여기엘 오셨었군요. 어머니께서 결혼 전이셨다면 얼추 우리 가족이 다녀가기 오륙 년 혹은 육칠 년 전쯤이겠네요.”


 사진 속 젊은 여성들의 모습 뒤로 보이는 목조 배 형상의 레스토랑 건물을 가리키며 라한이 말했다. 이번에는 문비가 놀랄 차례였다. 


 “네에? 라한씨 가족이 여기엘 왔었다고요?”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에요. 나무배처럼 생긴 레스토랑에 들어간 기억 그리고 라이브 무대를 빌려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바라보던 기억.”


 “맞아요. 고모도 라이브 무대 얘기를 했었어요.”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에 또 하나의 중첩된 우연이 있었던 것이다. 문비와 라한은 잠시 말을 잊은 채 경탄의 미소를 지었다. 


 “그 건물이 아직 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물론 외관을 보니 리모델링을 한 게 틀림없지만요. 어린 시절 내가 봤던 그 나무배라면 저렇게 깨끗할 수 없을 테니까요.”


 “고모 말씀에 의하면 꽤 오랫동안 비어 있는 상태로 방치되다가 작년에 와서야 리모델링이 이루어졌고 올해 초에 카페를 겸하는 독립서점으로 영업을 시작했대요. 고모가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아까 그 사진의 멤버 중에 이 지역 출신인 분이 계시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고모는 이 독립서점만의 특별한 시그니처 한 가지를 부연했었다. 그 또한 문비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까 그 사진 다시 보여줄래요?”


 라한이 요청했다. 문비의 어머니를 한 번 더 보려는 거였다. 


 “문비씨 어머니와 고모님 두 분 다 인상이 좋아요. 그리고 두 분이 얼굴이 닮지는 않았는데 같은 데로 통하는 결 같은 게 보이는 듯하다고나 할까요. 포근하면서 명랑하고, 명랑하면서도 진지해요.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요.”


 그와 함께 엄마의 젊은 얼굴을 찬찬히 보던 문비가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시누올케 되기 전부터 무척 절친한 사이였대요.”


 “문비씨에게도 있어요. 어머니와 고모님에게서 이어지는 어떤 결이.”


 “그런가요? 이제 슬슬 배가 고픈 것 같아요. 어서 들어가요, 우리.”


 문비가 설핏하게 웃고는 앞장서 걸었다. 


 서점 공간과 카페 공간은 가운데의 현관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이 카페, 오른쪽이 서점이었다. 따로 문이 있지는 않은, 현관과 이어진 얼마간의 빈 공간으로 구분된 개방 구조였다. 


 문비와 라한은 먼저 카페로 들어갔다. 바다 쪽으로 트인 넓은 창가에 앉아 간단히 요기를 했다. 11월의 연한 햇빛이 비쳐드는 자리였다. 창 너머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푸르고 또 푸르렀다. 


 서점 쪽도 카페와 마찬가지로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창들이 나 있다. 아기자기하고 정연하게 진열된 아름다운 책들에 둘러싸인 채 바라보는 푸른 바다 위 금물결은 카페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치 두 사람이 어느 동화의 삽화에라도 틈입한 것처럼. 


 여기가 삽화 안이라면 동화 바깥의 커다란 존재가 이 페이지를 얼른 닫아 주었으면. 그렇게 영원히 삽화로 머물렀으면. 


 문비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떠올리다 얼른 지워 버린다. 


 “여기 재미있는 게 있어요.”


 저쪽 끝에 가 있던 라한이 손짓하며 불렀다. 라한이 보고 있는 건 문비는 이미 알고 온, 이 서점의 시그니처였다. 


 한 벽면을 따라 나란히 늘어선 유리문 달린 책장들. 문에는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첫 번째 책장의 첫 번째 칸에만 책이 여남은 권 꽂혀 있을 뿐 나머지는 빈 책장들이다. 책마다 일련번호가 적힌 플래그가 붙어 있다. 


 맨 가운데 두 개의 책장만 키가 좀 작은데 그 위에 안내 문구를 새긴 나무 편액 두 점이 걸려 있다. 


 당신의 오늘이 담긴 책을 보관해 드립니다. 

 우리 서점에서 구입한 책 가운데 한 권을 여기에 보관할 수 있어요. 

 단, 몇 가지 규칙에 동의해 주셔야 해요.

 첫째, 보관 기간은 최장 2년까지예요. 그 안에는 언제라도 영업시간 중에 방문하여 찾아가실 수 있어요. 보관 기간 2년을 넘긴 책은 저희 서점에서 임의로 처분할 수 있어요. 

 둘째, 소정의 보관료를 내셔야 해요. 보관료는 책을 찾아가실 때 다시 돌려드려요. 

 셋째, 보관한 책은 반드시 저희가 발급해 드린 보관증을 제시하셔야만 내어드려요. 보관증을 누가 가지고 오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저희는 오직 보관증만을 근거로 그 보관증에 기재된 책과 보관료를 돌려드릴 것이에요. 

 오늘이 담긴 책을 보관하고 싶으시다면, 보관증을 잘 간수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이곳에 당신의 오늘이 담긴 책을 보관해 보세요. 

 (※책 속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남길 수 있는 필기구 여러 종이 카운터 옆에 비치되어 있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로 거기 보관된 책들을 훑어보았다. 


 제각각의 장르, 제각각의 제목. 그리고 책마다 잠들어 있을 누군가의 시간들, 그 시간에 얽혀 있을 내밀한 사색 혹은 감회들. 그렇다면 저 책들은 이제 책 그 이상, 누군가가 놓고 간 한 조각 마음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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