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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07. 2024

유성이 떨어진 곳에 가면


 낙조가 스러지자 하늘과 바다와 젖은 모래사장을 물들였던 색채와 빛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어둠이 점점 짙어졌고 모든 풍경이 무채색으로 흐려졌다. 아직 별조차 나오기 전, 희묽은 상현달만이 하늘의 지표이며 현실감의 이정표였다. 


 불현듯 광대한 적막감이 문비를 엄습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검은 어둠뿐이라면, 그것은 두려운 일인 동시에 외롭고 쓸쓸한 일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어두운 바다에 둘러싸여 마치 지워져 버린 듯 보이지 않는 작은 섬처럼 철저히 홀로 버려지는 일인 것이다. 


 “괜찮아요? 아, 너무 어두운가요?”


 문비의 급격한 침체를 감지한 것일까? 라한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명을 밝히려는 그를 문비가 손을 잡음으로써 제지했다. 


 “괜찮아요. 이대로 조금만 더 있어요, 우리. 별이 뜬 하늘을 보고 싶어요.”


 따스하고 보송한 그의 손을 꼭 잡고 문비는 하늘을 우러렀다. 내적 균열을 수습할 약간의 틈이 필요했다. 나약한 감상에 휘둘려 여행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별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문비는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었다. 


 밤하늘에 암흑만 있는 게 아니라 멀고 먼 우주로부터 긴긴 시간에 걸쳐 날아온 빛도 있다는 사실이 도움이 될 거라고. 그 증거인 여리지만 또렷한 별빛이 바닥 모를 적막감으로 떨어지던 자신을 붙잡아 줄 거라고. 


 마침내 별들이 하나 둘 찰랑거리기 시작하고 문비의 내면도 얼마간 안정을 찾았다. 가을 막바지의 밤바다 위로 별이 빛나는 광경은 어쨌거나 몹시 아름다웠고,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는 자분자분 평화로웠다. 


 “어렸을 때 유성이 떨어진 곳에 가면 별사탕 같이 생긴 반짝반짝 빛나는 알갱이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어요.”


 라한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노긋했다. 


 “우와, 귀여워라.”


 잡고 있는 손을 흔들며 문비가 말했다. 


 “아빠 말씀이라면 뭐든 믿던 한 시절이 있었어요. 많이 어렸고…….”


 “아빠를 많이 사랑했죠?”


 그가 생략한 말을 문비가 완성했다. 그는 어렸을 때 여읜 아버지를 말할 때는 꼭 ‘아빠’라고 했는데 문비는 그 점이 전혀 우습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그들 두 부자의 시간은 ‘아빠’에서 영원히 멈추어 버렸으니까. 


 그는 묵묵히 문비를 돌아보았다. 어스름에 잠긴 그러나 다감한 그의 눈을 향해 문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뺨을 지나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숨결에서 용담꽃의 향이 맡아지는 건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못내 애틋하고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해변에 머물렀다. 혹시 유성을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일정상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접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늦어진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문비는 쾌활함을 되찾았다. 향긋하고 담백한 송이버섯 샤브샤브를 앞에 두고 문비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웃음이 후해졌다. 평소보다 잘 웃는다 뿐 다른 징후가 거의 없었기에 라한은 그녀가 취하는 줄을 몰랐다. 


 숙소로 가는 길에 문비가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사야 한다고 우겼다. 그녀는 발음도 또박또박하고 눈이 풀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라한으로서도 말릴 까닭은 없었다. 


 숙소는 대형 리조트의 프라이빗한 스위트였다. 1층에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주방과 아담한 수영장이 있고 2층에 두 개의 침실이 있었다.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맥주를 마셔야 한다고 문비가 강력히, 강력히 주장할 필요가 없는데도, 강력히 주장했다. 


 “그 왜 포석정, 경주 포석정 가면 꼭 그 얘기 나오잖아요. 우리 조상님들이 술잔 띄워 놓고 시를 지으면서 마셨다는. 뭐 여기 술잔을 띄울 수는 없지만 발을 딱 담그고 술잔 띄웠다 치고 마시는 거지.”


 “유상곡수, 말이죠?”


 벌써 수영장 턱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고 맥주캔을 따고 있는 문비 옆에 자리 잡으며 라한이 장단을 맞춰 주었다. 


 “맞아요, 유상곡수. 유상곡수 하니까 각촉부시가 떠오르네. 왜 그 고려시대, 초에 눈금 그어 놓고는 저 눈금이 타기 전에 시를 지으시오 했다는. 저 눈금이 타기 전에, 하니까 또 삼국지 관우의 술잔이 식기 전에, 그게 또 생각이 나고.”


 웃음에 이어 말까지 많아진 문비를 보며 이제야 라한은 그녀가 취했나 보다 싶었다. 웃음과 말은 많아지고, 말끝은 자주 짧아지고, 말의 내용은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고. 그런 그녀가 그에게는 마냥 귀여울 뿐이고. 


 “자자, 이 맥주가 미지근해지기 전에, 짠.”


 캔을 부딪치며 문비가 권했다. 라한은 기꺼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그는 몇 모금 마시고 캔을 내려놓았지만 문비는 계속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체하겠어요.”


 라한의 말에 문비는 입에서 캔을 떼고 멋쩍은 듯 헤헤 웃었다.


 “내가 취한 것 같죠?”


 자세를 고쳐 앉은 문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라한은 말없이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흐트러진 옆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사실은 그래요, 취한 거 맞아요. 근데 많이는 아니고 조금. 기분 좋을 만큼.”


 문비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말한 그대로였다. 취하긴 했으나 말할 수 없는 일들을 말해 버릴 만큼 취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셔도 끝내 그 말들은 파헤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영악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문비는 스스로가 다행스럽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마지막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는 문비의 요청으로 라한이 아이스크림을 꺼내러 간 사이 문비는 수영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도로 냉동실에 넣고 온 라한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간 그는 그녀를 침대에 곱다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방을 나가기 전 라한은 잠시 잠든 문비를 애수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오늘의 그녀는 어쩐지 조마조마해 보이는 데가 있었다. 이 느낌이 기우이기를 바라며 그는 살며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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