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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10. 2024

그림 같은 연인


 다음 날은 저녁 식사 예약 외에는 정해진 바가 없는 아주 느슨한 하루였다. 


 한산한 해안도로를 차로 느긋하게 달리는 동안 바다는 깊은 푸른빛으로 넘실거리고 태양빛은 수면에 부딪쳐 반짝임으로 흩어졌다. 


 지난밤 술기운으로 지껄였던 허튼소리들은 문비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행히도. 그리 치명적인 실언이 없었다는 사실은 일말의 위안도 되지 못했다. 문비는 간혹 한 번씩 자신이 했던 횡설수설이 떠올라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춰야 했다. 


 그러나 라한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천연했고 늘 그렇듯 유쾌하고 다정했다. 다행히도. 그는 문비가 혼자 겸연쩍어하는 것 또한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돌이켜 보면 그와 함께한 시간들은 문비에게 언제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젯밤에도 그는 문비의 말도 안 되는 몽중설몽에 예사롭고 재치 있게 호응해주었다. 말을 얹어야 할 때 마침맞게 얹고 웃어야 할 때 명랑하게 웃고. 


 그의 세심함과 너그러움을 상기하자 문비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 어때요? 괜찮을 거 같은데.”


 평온을 찾은 낯빛으로 그를 보는데 마침 그도 문비를 돌아본다. 무언가 의견을 구하고 있었나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중하고 여유롭게 운전하고 있고, 차는 여전히 빠르지 않은 속도로 바다 풍경을 옆에 끼고 매끄럽게 나아간다. 


 “네, 좋아요.”


 무언지도 모르면서 문비는 주저 없이 좋다고 말한다. 


 그 대답에 라한이 싱긋 웃는다. 그녀의 생각이 어딘가 다른 데를 헤매다 돌아온 걸 그는 모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같은 내용의 질문을 몇 번째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골똘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를 몇 번이나 돌아보기도 했고. 


 그의 웃음 앞에 문비도 말갛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문비는 방금 그 얘기가 무슨 얘기였냐고 굳이 확인하지 않는다. 다시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는 라한의 표정이 재미있어 보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선택하여 찾아간 장소는 선사유적박물관이었다. 라한이 우연히 이정표에서 보고 문비에게 어떠냐고 물었던 그곳. 


 문비는 넓게 펼쳐진 갈대밭이 마음에 들었다. 바람이 불면 갈대들이 일제히 낭창하게 몸을 숙여 홀보들한 물결을 이루었다. 낙엽 내음이 짙은 탐방로를 천천히 걸으면서 감상하는 갈대의 군무는 운치로웠다. 


 이어서 두 사람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때로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때로는 진지한 눈으로 야외 유적과 실내 전시실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학생 때는 무심히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것들이 어른이 된 지금 오히려 흥미롭고 신기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한 건 문비였다. 


 “갑자기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올랐어요. 운전 내가 할게요. 라한씨는 좀 쉬어요.”


 “어딘지만 알려 줘요. 운전은 계속 내가 해도 돼요. 설렁설렁 다녀서 피곤하지 않아요.”


 “해안도로를 직접 운전해서 달리는 맛이 또 있잖아요. 이번엔 내가 해요. 안전하게 모실 테니 염려 놓으시고.”


 결국 문비가 운전석에 앉았다. 핸드폰을 통해 지도를 보아 두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해안도로만 따라가면 되고 이정표도 있을 테니 찾기 어렵지 않을 터였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그곳은 요트항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획에 없던 요트를 탔다. 


 요트는 날렵했고 바람은 적당했다. 가장자리에서 맞는 물보라는 시원했고 갑판 위에서 바라보는 수평선과 하늘은 사진인 듯 맑고 선명했다. 바다 가운데에서 보는 바다는 육지에서 보던 바다와는 또 달랐다. 더욱 위압적이고 더욱 아름다웠다. 


 아름다움도 상처를 준다는 걸 문비는 알고 있었다. 시력을 잃게 되리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점차적으로 깨닫게 된 거였다. 망망대해를 달리는 요트 위에서 문비는 또 뜻하지 않게 마음을 베였다. 단지 바다와 하늘 때문에.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문비가 수평선을 향해 넋을 잃은 듯 망연한 눈빛이 되었을 때 라한이 그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었다. 문비는 곧 침착을 되찾고 천천히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저 바다와 하늘이.”


 “저 바다와 하늘을 담은 그 두 눈도.”


 라한이 문비의 두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그의 두 눈에서도 바다가 출렁이고 하늘이 빛났다. 훗날 이 순간을 어떤 순간으로 회상하게 될지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안온한 시간이 낯설고도 익숙하게 흘러갔다. 


 저녁 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나선 두 연인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살짝 격식 있게 차려입은 정도지만 문비는 우아하고 라한은 근사했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내내 두 사람의 얼굴에는 봄 같은 미소와 여름 같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요리는 모양 좋고 맛깔스러웠으며 와인은 향긋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리 많이 먹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은은한 조명에 비친 문비의 속눈썹이 날개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보고 있던 라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그녀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투명해서 그를 초조하게 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초조함이었다. 


 “웬 한숨이에요?”


 물을 마시던 문비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이 자꾸만 투명해지는 것 같아서 불안해요. 그렇게 투명해지다 보이지 않게 될 것 같아서. 이대로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그럴 리 없잖아요? 내가 무슨 마술사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인 문비가 검지로 자신의 볼을 콕콕 찌르더니 라한의 손등을 톡톡 쳤다. 


 “봐요. 난 투명해질 수도 사라질 수도 없는 평범한 한 인간이라고요.”


 자신의 손등에 닿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라한이 조용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가 바보가 됐나 봐요. 당신을 사랑해서. 그 사랑을 꼭 지키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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