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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05. 2024

빛보다 환하고 눈부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닮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마주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네 개의 눈동자는 호기심 어린 즐거운 상상으로 빛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돌아서서 진열된 책들 사이로 향했다. 그러고는 각자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는 내내 일정 거리가 있었고 누구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보는 책을 슬며시 살피는 일도 없었다. 서로가 고른 책을 모르게 하자는 묵시적인 약속이 있었으므로. 


 문비가 먼저 책 한 권을 골라 들고 창가로 갔다. 창가에는 책 올려놓기 좋게 옆으로 길게 뻗은 원목 입식 탁자가 있었다. 얼마 동안 책을 뒤적이던 문비는 이윽고 책을 숨기다시피 안고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 놓인 종을 울리자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입구로 들어와 카운터 안쪽에 자리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각자 보관한 책을 비밀로 하기로 했거든요.” 


 책 보관을 신청한 문비가 소리 낮춰 조용히 덧붙였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서점 직원이 미덥고 상냥한 목소리로 나직이 답했다. 문비의 책은 이내 카운터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카페로 건너가서 차 한 잔 들면서 기다리세요. 책을 보관하시면 저희가 직접 만든 수제 차 한 잔을 드린답니다.”


 직원이 차를 마실 수 있는 쿠폰을 건네주었다. 차는 카페 메뉴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오직 서비스로만 제공되는 것이라 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쿠폰을 들고 서점을 나서던 문비가 갑자기 몸을 돌려 다시 직원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혹시 책을 보관하고 나서 차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마음이 바뀌어 곧바로 책을 찾아가는 이들도 있었나요?”


 “있었답니다. 전혀 문제될 것 없는 일이고요.”


 직원이 미소를 지었다. 문비도 미소로 화답하고 카페로 건너갔다. 


 쿠폰을 내미는 문비에게 카페 직원이 설명했다. 


 “몇 가지의 꽃차와, 잎차, 뿌리차가 준비돼 있어요. 직접 고르시겠어요? 아니면 랜덤으로 하시겠어요?”


 “랜덤이 좋겠어요.”


 문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최근 그녀는 너무 많은 결정과 선택을 해야 했다. 개중에는 중대하고 무거운 사안도 몇 가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랜덤에 끌렸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잠시 후 문비는 아까 앉았던 창가 자리에 다시 앉아 앞에 놓인 유리잔을 응시했다. 잔 속 뜨거운 물은 서서히 호박색으로 변하고 마른 꽃 몇 송이가 조금씩 부풀었다. 향이 구수하고 맛이 순한 엉겅퀴 꽃차였다. 


 차를 반쯤 마셨을 때 라한이 왔다. 그가 테이블에 내려놓는 유리잔에서는 연한 청보랏빛이 우러나고 있었다. 수면에서 차츰 물을 머금으며 부피를 불리는 용담꽃을 당연히 문비는 곧바로 알아보았다. 


 “용담꽃차. 직접 고른 거예요? 랜덤이에요?”


 “랜덤.”


 라한이 잔을 들어 조금 마셔 보았다.  


 “차 맛,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용담꽃차의 맛을 알고 있는 문비가 물었다. 


 “꽤 괜찮은데요?”


 첫맛은 쌉싸름한데 찬찬히 음미하자니 끝맛은 달큰했다. 


 “참 신기하죠? 어쩌면 이렇게 둘 모두에게 딱 맞는 차를 내주었을까요?”


 문비는 짐짓 경쾌하고 해맑은 소리를 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은 비감에 잠겼다. 왜 하필 엉겅퀴꽃인가, 용담꽃인가. 때로는 우연이 예언을 하는가. 그녀는 두 꽃의 꽃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웃음에 어쩐지 물기가 어린 것 같아 라한은 의아했다. 어쩌면 햇빛에 시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라한은 한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그 손이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서 햇빛가리개가 되었다. 문비는 시원스러워진 눈매로 더 활짝 웃었다. 그녀의 파안대소가 그에게는 빛보다 환하고 눈부셨다. 


 진짜 덤은 한 잔의 차가 아니라 차 마시는 동안의 시간이었다. 보관된 책의 갈피에는 이 시간까지도 고스란히 보존될 터였다. 그 책을 다시 펼치는 날, 이 안온하고 눈부신 한때가 꽃처럼 다시 피어날 것이다.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은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 체크인한 다음 다시 바다로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담하고 깨끗한 해변이 있었다. 


 제철이 지난 바닷가는 한적했다. 뒤로는 소나무 언덕, 앞으로는 맑은 하늘에 몇 점의 구름, 그 아래로는 잔잔히 다가와 하얗게 흩어지는 파도. 고요히 낙조를 감상하기에 그만인 곳이었다. 


 “춥지 않아요?”


 “전혀요.”


 신발을 벗어 놓고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로 맨발로 파도를 차며 놀던 문비, 라한을 돌아보며 씩씩하게 손사래 쳤다. 라한은 그녀가 필요로 할 때 손 내밀어 잡아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보조를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나와요. 그러다 발 얼겠어요. 곧 해도 질 거고.”


 “알았어요.”


 미리 깔아 둔 돗자리로 걸어가던 문비가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고 기우뚱했다. 뒤따라가던 라한이 기민하게 그녀를 잡아 부축했다. 돗자리에 앉아 발을 닦고 양말과 신발을 신으면서 문비는 라한 모르게 자꾸 눈을 깜박였다. 


 어느 결엔가 하늘빛이 점점 옅어지는가 싶더니 수평선 위로 불긋한 까치놀이 번지기 시작했다. 바다는 온통 엷은 금빛을 띤 물비늘로 뒤덮이고 파도에 젖어 번득이는 모래사장에 하늘과 노을이 얼비쳤다. 


 “그냥 괜히 해 없는 낙조가 보고 싶었어요. 여기선 넘어가는 해를 볼 순 없지만, 이것도 분명 낙조인 거잖아요.”


 말하는 문비의 얼굴에도 노을빛이 머물렀다. 문비가 라한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차분한 낙조의 풍광은 시시각각 미세하게 변해 가고 주위로 묽은 어둠이 내렸다. 두 사람 다 말을 잊은 듯이 묵묵했다. 흩뜨리고 싶지 않아서. 이 고즈넉함을, 적적한 아름다움을, 그윽한 공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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