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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12. 2024

창밖은 검푸른 밤

 

 문비는 잡힌 손으로 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토록 동요하는 건 사랑을 확인한 희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맥이 뛸 때마다 심장이 날카롭게 슴벅였다. 


 라한은 정말이지 바보 같은 고백이었다는 자각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한층 짙어진 그의 두 눈은 확고하고 절실한 사랑의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그의 초조함을 문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이나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닐 것이기에. 


 “잘 간직할게요. 방금 그 말.”


 사랑해서, 라는 말. 지키고 싶어서, 라는 말. 


 잠시 잊혔던 주위의 풍경과 사람들과 가벼운 소음들이 되살아나고, 잡고 있던 손을 아쉬움 속에 놓았을 때 문비가 말문을 열어 속삭였다. 녹녹해진 그녀의 음색에 깃든 달곰쌉쌀한 애수가 라한의 가슴을 아리게 휘저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숙소 뒤편의 산책로를 걸었다. 제법 쌀쌀했지만 오래 걷고 싶은 밤이었다. 가까운 솔숲에서 청량한 공기가 흘러오고 늘어선 가로등의 불빛은 따스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느끼곤 한다는 기시감을 문비와 라한도 느꼈다. 마치 이전에도 이렇게 함께 포실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던 것만 같은. 


 서로의 존재를 비롯하여 모든 일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문비가 씻고 나왔을 때 라한은 1층 거실에서 연필과 공책을 들고 무언가 하고 있었다.


 “뭐해요?”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문비가 다가가자 그가 공책을 보여주었다. 


 “오선지노트? 이런 걸 가져왔었어요? 아, 이건…….”


 라한이 그려 넣고 있던 음표들을 본 문비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잠깐만요.”


 하더니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돌아오는 그녀의 손에 칼림바가 들려 있었다. 


 “나도 이거 가지고 왔거든요.”


 “연주해 줄 수 있어요?”


 미완성의 악보를 가리키며 라한이 요청했다. 그 악보는 낮에 문비가 갈대숲을 거닐다 ‘지금 갈대숲에서 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려요.’ 하면서 들려준 허밍이었다. 


 바깥의 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되는 건 문비에게는 익숙하고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심코 콧노래처럼 부르다 남이 듣게 되는 건 어색해 하는 편인데 이제 라한은 유일한 예외가 되었다. 


 문비가 흔쾌히 칼림바를 손에 들고 키를 튕겼다. 갈대숲에서의 멜로디 뿐 아니라 유적과 유물들을 둘러보다 흥얼거렸던 장난스럽거나 엉뚱한 곡들까지 차례로 연주했다. 


 “많이 늘었네요, 연주. 소리가 전보다 훨씬 매끄럽고, 명징하고.”


 “나름 부지런히 연습했거든요. 사실은 연습을 위한 연습은 아니었고, 소리가 좋아서 자주 만지작거리게 된 거지만.”


 문비는 라한의 칭찬이 기뻤고, 라한은 문비가 칼림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녹음하고 싶은데 다시 들려줄래요? 악보로 옮기려면 불완전한 내 기억보다 녹음이 확실할 테니까.”


 “그렇게 해요.”


 잠시 생각한 끝에 문비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이 곡들, 엉성해서 부끄럽지만 선물할게요. 그러니까 녹음도 악보도 다 라한씨 소유인 것으로. 받아주는 거죠?”


 “나야 영광이죠. 나중에 가서 말 바꾸기 없기.”


 웃으며 끄덕인 문비가 다시 연주 태세를 갖추었다. 라한이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연주를 끝낸 문비가 라한에게 칼림바를 내밀었다. 


 “답례로 한 곡 들려줘요.”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는 문비를 보며 라한은 느릿느릿 칼림바를 받아 들었다. 


 “감안하고 들어줘요. 나도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는데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거.”


 라한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경쾌한 듯 쓸쓸하고 쓸쓸한 듯 아늑했다. 연주가 끝나자 문비가 소리 없는 박수를 치며 물었다. 


 “굉장히 좋은데요? 무슨 곡이죠?”


 “우아한 유령. 작곡가는 윌리엄 볼컴이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는 곡이에요. 추모곡이지만 마냥 슬픈 게 아니라 좋았던 추억을 다시 꺼내 어루만지는 듯 아련한 포근함이 있어요. 제목처럼 우아하기도 하고.”


 두 사람은 아름다운 곡조의 여운에 젖어 얼마 동안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침묵을 깬 것은 문비였다. 


 “맞다. 아이스크림. 어제 안 먹었잖아요. 지금 먹을까요?”


 문비가 꺼내온 아이스콘을 하나씩 들고 두 사람은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장난을 치는 연인의 얼굴에 달콤함이 묻었다. 


 입가를 닦으려던 문비의 손을 라한이 잡았다. 그가 얼굴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어느 입술에선가 아이스크림 맛이 났다. 


 들고 있던 아이스콘을 컵에 넣은 문비가 라한의 손에 들려 있던 것도 빼앗아 컵에 넣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었고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냐고. 정말 원하는 거냐고. 


 그녀는 엷게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우리가 공유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이건 아주 온당한 흐름이라고. 


 방으로 들어서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의 입술이 조금 전과 달리 뜨거웠고 키스는 절박하고 농밀했다. 숨결이 흐트러진 그녀가 그에게 팔을 감았다. 


 어느 결에 그녀는 눕혀진 채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마에서부터 눈을, 코를, 입술을 느릿하고 애틋하게 더듬어 내려갔다. 


 앞으로 나는 당신을 눈이 아닌 손끝으로 봐야 하겠지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그릴 때면 기억으로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기보다 손을 들어 허공에 당신을 조각하는 것이 어쩌면 더 생생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전에 속눈썹을 내렸다. 목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그의 손길은 긴장되어 있으면서도 나긋했다. 서그러운 그의 눈동자에 격정이 차올랐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쇄골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그녀는 아득한 열기 속에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먼 파도소리를 감싸 안은 검푸른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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