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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n 14. 2024

아름다운 것들은 꿈속에


 비교적 온화했던 11월이 가고 추위와 함께 12월이 왔다. 문비는 몇 주 동안 산골과 도시를 여러 번 오갔다. 그리고 12월 중순 경에는 산골 별장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도시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라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은성도 마을 할머니들도 아쉽고 서운했지만 아무도 유난 떨지 않고 평온하게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넸다. 문비 또한 산골에서 지내며 도시에 다니러 가던 때처럼 담담하게 굴었다. 


 그러고는 다들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어서 마지막 배웅은 당연하게 라한의 차지가 되었다. 문비와 라한은 오래된 다리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은성을 따라가다 말고 되돌아온 깨금이 그들의 앞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 보니 깨금이한테 인사하는 걸 깜빡했네. 미안해라.”


 문비가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깨금이 문비의 손에 턱을 올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깨금의 턱을 살살 긁어주면서 문비는 자신이 개라는 존재와 이토록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생각해 보면 다 깨금이 덕분이었다. 


 깨금과 친해지면서 문비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신뢰하는 인간을 향한 동물의 사랑.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순수하며 헌신적이었다. 오직 동물들만이 줄 수 있는 사랑과 위로와 격려가 따로 있음을 문비는 깨금이라는 개를 통해 배웠다. 


 “우리 깨금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아프지 말고, 슬프지 말고, 항상 행복해야 해.”


 흑포도 같은 깨금의 눈을 보며 문비가 당부했다. 깨금은 알아들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깨금아. 인사 나눴으니까 이제 가도 돼.”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라한이 말했다. 영특한 깨금은 라한을 한 번 쓱 올려다보더니 총총거리며 집을 향해 걸었다. 가는 깨금의 뒷모습을 문비가 정답게 바라보고 그런 그녀를 라한이 애정이 담뿍한 눈으로 응시했다. 


 “눈은 언제쯤이나 내릴까요?”


 시선을 하늘에 두고 묻는 문비의 어조에서 섭섭함이 묻어났다. 12월 들면서 은근히 눈을 기다렸던 것이다. 소박하고 예쁜 이 숲속 마을에서 라한과 함께 첫눈을 보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눈은 내릴 기미가 없었다. 춥고 건조하고 맑은 날의 연속이었다. 야속하게도. 


 “일기예보 상으로는 당분간 겨울 가뭄이 계속된다고…….”


 “그래도 혹시 몰라요. 여기는 산이라서 갑자기 예보에 없던 소나기눈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래요? 본 적 있어요, 소나기눈?”


 “그럼요. 내가 여기 드나든 지가 몇 년인데.”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면서 굵은 눈송이가 펑펑 내려오는 소낙눈. 얼핏 보면 눈이 아니라 우박처럼 보일 만큼 푹푹 내리꽂히는 눈발. 삽시간에 세상을 하얗게 채색하고는 돌연하게 뚝 그쳐 버리는 소낙눈의 조홧속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여기 눈 예보 있다고 하면 올 거예요?”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여 시선을 가까이 마주치고 라한이 물었다. 이번 겨울의 첫눈은 그녀와 꼭 같이 보고 싶었다. 


 “올게요.”


 흔연히 대답한 문비가 몸을 일으켰다. 라한이 따라 일어났다. 그녀의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못 보는 동안에도 잘 지내고 있기.”


 미소를 보이며 문비가 말했다. 라한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였다. 문비가 차에 타기 위해 손을 놓는데 라한이 다시 힘주어 붙잡아 당겼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그는 그녀의 여린 등과 둥근 머리를 애틋하게 안았다. 


 “눈 맞으러 올게요.”


 문비의 말에 라한은 느리게 끄덕였다. 


 차를 운전해 천천히 마을을 벗어나면서 문비는 자꾸만 가슴이 뭉클거렸다. 


 어리석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산속 도로가 끝나는 지점을 통과하고 나면 이곳을 영영 잃어버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여기는 꿈이고 바깥은 생시라서 아름다운 것들은 여기 남고 저쪽에서는 혹독한 실제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집으로 돌아오고도 며칠은 기분이 이상하고 어수선했다. 그러나 문비는 점점 냉정을 되찾고 눈앞의 현실에 순응했다. 


 엄마의 예전 다이어리에서 찾아낸 핸드폰 번호로는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헛수고였다. 발신 신호는 가는데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또 한 번 통화 실패의 기록만 쌓은 문비는 무릎을 안고 앉아 엄마의 사진을 건너다보았다. 사진 속 엄마는 금방이라도 재미있는 말을 꺼낼 것처럼 반쯤 웃는 얼굴이었다. 


 “이 폰 번호, 누구 거야? 혹시 내가 아무것도 아닌 번호를 가지고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거면 그렇다고 말 좀 해줘.”


 사진이 대답할 리 없고 허탈한 한숨만 나왔다. 문비는 엄마 방을 나와 욕실로 갔다. 양치를 하려고 칫솔에 치약을 짜던 문비가 멈칫했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 탓이었다. 머리를 흔들고 눈을 깜빡거려 보았으나 틀림없이 양쪽 시야가 모두 흐렸다. 


 문비는 충격을 받았다. 동시적으로 두 눈에 시각 이상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칫솔과 치약을 손에서 놓쳤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물을 틀어 눈을 씻어냈다. 


 이때 하필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아까 통화를 시도했던 그 번호의 주인일지도 몰랐다. 문비는 다급하게 욕실을 나가려다 치약을 밟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는데 치약이 보였다. 치약과 칫솔을 주워 놓고 나가려고 허리를 숙이던 문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면대 모서리에 오른쪽 이마를 부딪쳤던 것이다. 극심한 통증과 함께 서늘한 피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참아 보려 해도 기어이 눈물이 솟구쳤다. 어디에도 풀 수 없는 분노와 절망으로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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