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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27. 2024

적막하고 늠름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온기가 야외용 난로보다 더 따스했다. 문비는 마치 자기장처럼 주위를 감싼 아늑함에 기대어 앞일에 대한 상념을 끊어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온 마음을 다 부려 놓기. 이것이 요즈음의 문비에게는 지상 과제였다. 


 “안톤. 스노카이팅 얘기 좀 해주세요. 라한씨가 그러는데 그 뭐라더라 베이트? 세계 최대의 스노카이팅 대회 거기도 나갔었다면서요?”


 문비가 묻자 안톤이 기쁜 얼굴을 했다. 


 “베이트 대회는 정말 힘들어요. 바닥까지 힘든, 완전 끝까지 힘든…… 그러니까 그걸 뭐라고 하면 되지?”


 안톤이 한국어 단어를 찾기 위해 라한에게 도움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극한, 극한의 체험.”


 “극한의 체험! 어디를 봐도 다 눈밖에 없어요. 날이 흐리면 땅과 하늘이 하나예요. 그냥 다 하얀색만 보여요. 가다가 혼자 되면 그땐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과 같아. 기본적으로 GPS가 있는데 혹시 작동 안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보이는 것도 없으니까 하얀 눈이 꼭 어둠처럼 느껴져요.”


 듣고 있던 문비는 그만 아득해진다. 어디를 돌아봐도 하얗기만 한 설원,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상상되어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은성과 세 할머니도 궁금하여 모두가 안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한의 눈은 문비에게 머물러 있었다. 어째서? 당신의 물음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절박하게 들리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말이 왜 마치 당신 자신의 질문처럼 들리는 것일까?


 “바람을 읽어요.”


 “바람? 그것뿐인가요?”


 300Km나 되는 혹한의 설원에서 의지할 거라곤 바람뿐이라는 건가. 문비는 인간이라는 종의 특이성을 생각한다. 저런 일을 자처하여 즐긴다는 점에서.


 “바람을 타고 가게 되어 있는 거니까요. 바람이 약해서 연을 제대로 못 띄우면 걸어요. 이런 일도 처음부터 준비해요. 그런데 정말 멋진 순간들이 있어요. 극한으로 힘든데 멋져요. 말로 표현 못해요. 얼마나 멋진지. 직접 해봐야 아는 그런 좋은 것들 그때그때 만날 수 있어요.”


 안톤은 그 멋짐을 콕 집어 전달하지 못함을 몹시도 아쉬워했다. 멋지거나 즐겁거나 신비로운 체험이 순간순간 다가왔다 사라지고 또 다가왔다 사라지고를 거듭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고통이나 긴장으로 채워졌지만. 


 라한이 안톤에게 동감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경험자니까. 그런데 의외로 세 할머니가 하나같이 그게 뭔지 알 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에게는 안톤의 스노카이팅 이야기가 한평생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스노카이팅, 한 번 해 보고 싶어지네.”


 은성이 라한을 향해 말했다. 그녀의 말을 안톤이 냉큼 받았다.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취미로 가볍게 할 수도 있어요. 겨울에 오세요. 내가 안내할게요.”


 “고, 고마워요. 그치만 꼭 하겠다 그런 뜻은 아니고…….”


 옆에 있는 문비의 뒤로 반쯤 숨다시피 하며 은성이 작게 대답했다. 할머니들이 그녀를 귀엽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동쪽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달이 둥실하고 교교했다. 정겹고 흐뭇한 가을밤이었다. 


 안톤이 머무는 며칠 동안 날은 내내 맑고 쾌적했다. 그는 할머니들의 밭과 집에 놀러 다니랴, 라한의 작업실을 구경하고 현악기 제작에 대해 토론하랴, 은성이 만드는 여러 가지 소품들을 구경하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안톤이 떠난 다음날 새벽, 그간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무색하리만치 기온이 뚝 떨어졌다. 찬 서리가 하얗게 내려 온 세상이 은빛으로 뒤덮였다. 


 문비는 아침 일찍 고욤나무를 보러 나섰다. 흰 서리를 비단처럼 입은 경치는 산골에서도 귀한 것이었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서 기상 조건이 잘 맞아떨어져야 제대로 희고 보송보송한 서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같이 가기로 한 한실댁이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보러 가는 고욤나무는 한실댁의 남편인 한실양반이 우연히 발견한 거였다. 


 그러니까 이 나무는 남승효 교수가 어릴 때 누이동생에게 고욤을 따 주던 그 나무는 아니다. 그 나무는 임도를 만들면서 베어졌다. 남 교수는 그 나무를 마당으로 옮겨 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까워했다. 


 길을 따라 아래로 한참 내려가 산모롱이를 빙 둘러 들어갔다. 다시 또 어지간히 걷고서야 양지바른 집터가 나왔다. 집이 있었던 건 거의 반백 년도 더 전이었기에 드문드문 보이는 허물어진 주춧돌 아니었으면 집터인 줄도 모를 수풀땅이었다. 


 고욤나무는 집터 남쪽에서 홀로 우뚝했다. 온몸에 서리를 둘러 마치 은으로 만든 나무인 듯 아슴푸레한 윤채를 머금고 서 있었다. 적막하고 늠름하게, 은연하고 담담하게. 


 한실댁이 작은 낫처럼 생긴 도구를 맨 긴 장대를 가져왔기에 나무에 오르지 않고도 고욤을 딸 수 있었다. 문비가 하겠다고 했지만 한실댁은 자신이 직접 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문비는 순순하게 물러섰다. 


 문비가 늘 하던 대로 관찰, 사진 촬영, 채집과 메모까지 마치고 보니 한실댁이 따 모은 고욤이 대광주리에 소복했다. 고욤은 큰 포도알만 하고 꼭지가 열매보다 컸다. 색은 어두운 자줏빛이 드는 중이었다. 


 “자, 먹어 봐라. 내가 맛을 보니 제법 달큼하다.”


 한실댁이 고욤 몇 개를 건넸다. 


 “맛있는데요? 감말랭이랑 비슷한 거 같아요.”


 “비슷하지. 나무에 둔 저대로 겨울을 맞으면 색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열매는 골아서 주름이 생기는데 맛은 더 좋아져. 곶감 안 부럽단다.”


 “그럴 것 같아요.”


 사람의 손을 탄 고욤나무 가지 끝의 서리가 다른 서리보다 이르게 녹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던 문비의 뺨에 서리 녹은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저 아름다운 서리는 오전이 채 가기도 전에 녹아 버릴 것이다. 물방울이 되었다가 햇볕에 증발할 것이다. 가뭇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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