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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20. 2024

그 시간을 채웠을 풍경, 온도, 바람...


 집에서는 여전히 집 냄새가 난다. 거실 창가의 운목이도 푸른 날개 같은 잎사귀를 겹겹이 펼친 채 변함없이 의연하다. 집 냄새의 몇 할쯤은 엄마의 흔적일 텐데 어쩌면 이렇게 여전할까. 아닌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문비는 거실 창가에 서서 오래 고심한다. 단서를 찾고 싶다. 자신이 이설의 뱃속에서 무화과처럼 자라고 여무는 동안, 그렇게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는 동안 바로 옆에 이정인이 있었다고 확신하기에. 그러니까 자신과 엄마와 생모 셋이 함께였던 시간에 대한 단서를. 


 궁금하다. 그 시간을 채웠을 풍경, 온도, 바람, 냄새, 감촉, 표정, 말, 기분, 감정 그런 것들. 그리고 엄마는 언제 결심했던 건지. 나라는 존재를 사랑하겠다는, 한 점 티 없이 그늘 없이 완전하게 사랑하겠다는, 담대한 관용의 결심을. 


 창 너머의 어둠과 불빛이 조금씩 번진다. 가을비가 내린다. 


 이 비가 지나가고 나면 가을은 깊다 못해 막바지에 이를 것이다. 산중에는 서리가 내리고 고욤나무의 고욤에 단맛이 들겠지. 고욤 열매가 바로 남 교수의 수필집에 수록될 맨 마지막 글의 소재 즉 이번 프로젝트에서 문비가 그릴 마지막 그림이다.


 여행은 고욤을 그린 다음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기로 되어 있다. 그때까지 문비에게는 마무리하고 정리할 일들이 많다. 


 한참을 미동 없이 서 있던 문비가 엄마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부터 하나하나 꼼꼼히 뒤져 살피기 시작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문비는 엄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샅샅이 꺼내 훑어보았다. 


 찾아내려는 거였다. 이정인과 이설과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가문비가 공유했던 시간에 대한 간접적이거나 막연한 실마리라도. 찾고 나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작심 같은 건 없었다. 일단은 단서 자체가 목적이었고 거의 강박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간절했다. 


 문비가 산골 마을로 돌아간 것은 나흘 만이었다. 차에서 내려 걷던 문비는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에서 낯선 이와 조우했다. 


 “안녕하세요?”


 그는 깨금이와 함께였고 깨금이가 문비를 반가워하는 것을 보자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에, 안녕하세요?”


 깨금이가 그와 친해 보였기에 문비도 그가 라한의 손님임을 짐작하고 답인사를 했다. 그는 블론드 빛깔의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유럽계 남자였다. 


 “오오, 이런……. 요한나, 요한나 이미 늦었구나. 가여운 요한나.”


 호의적인 눈길로 문비를 바라보던 그가 조금은 어눌한 발음의 한국어로 탄식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문비는 어리둥절하여 깨금이에게 인사하려던 것도 잊고 서둘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전 이만…….”


 다시 발을 떼려는데 저만치 왼쪽의 돌계단 길을 내려오는 인기척과 함께 라한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문비씨!”


 문비는 발을 멈추고 기다렸다. 


 “라한씨.”


 몇 걸음 앞까지 가까워진 그를 부르고는 눈빛으로 물었다. 


 누군가요, 저 사람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요. 


 라한이 시원스러운 웃음과 함께 그를 소개했다. 


 “이 친구는 독일에서 온 안톤 슐츠.”


 문비도 아는 이름이었다. 라한의 스승인 벤야민 슐츠의 아들이자 라한의 막역한 친구라고.


 “안톤, 이쪽은 가문비. 저 언덕 위의 별장에서 지내고 있는 식물세밀화가.”


 “가문비. 가문비? Fichte? 정말 Fichte라고?”


 안톤이 라한을 향해 물었다. 라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문비에게 설명했다. 


 “Fichte는 가문비나무를 뜻하는 독일어예요.”


 듣고 나니 문비도 안톤의 반응이 이해됐다. 안톤 역시 현악기 제작자이니 그 재료인 가문비나무를 이름으로 가진 사람을 만난 게 신기하거나 반가울 수 있겠지.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문비.”


 안톤이 문비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안톤.”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으며 문비는 고민했다. 그런데 아까 그 요한나 어쩌고는 무슨 소리였을까, 이걸 직접 물어보면 실례일까 아닐까.


 “라한. 우리 요한나 슬퍼할 거야.”


 안톤이 다시 요한나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다. 


 “왜? 요한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라한이 놀란 얼굴로 염려스럽게 물었다. 


 “세상에! 너는 기억 못하는 거야?”


 야속하다는 표정의 안톤이 독일어로 무어라 무어라 덧붙였다. 듣고 있던 라한이 조금 어색하게 웃더니 문비를 슬쩍 보았다. 문비는 자신이 끼어들어도 되는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면서도 궁금해서 다시 한 번 눈빛으로 뜻을 전했다. 


 안톤이 뭐라고 했어요? 요한나는 또 누구죠? 


 대답은 안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안톤이 라한의 웃음과 비슷한 웃음을 띠고 문비에게 말했다. 


 “요한나, 나의 아기 동생, 여동생입니다. 요한나와 나는 열두 살 차이. 요한나 지금 열일곱 살이고. 요한나 열한 살에 라한 처음 보고 반해서 스무 살 되면 라한과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라한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으니까, 요한나 기회 없습니다. 요한나 늦었어요.”


 아아, 그런 일이. 문비도 겸연쩍은 웃음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럽고 진중한 아이예요. 안톤의 여동생이니 나에게도 여동생이죠. 요한나가 케이팝과 한국어를 좋아한 덕분에 안톤도 한국어가 많이 늘었고요.”


 문비를 향해 설명하는 라한을 보면서 안톤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끄덕이다가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신 웃으면서. 


 어제 여기에 도착한 안톤은 라한을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이라는 걸. 그리고 방금 전 문비와 마주치는 순간 감을 잡았던 것이다. 그녀가 바로 라한의 사랑을 가진 여자라는 걸.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니 안톤의 안목에도 더없이 어울리는 한 쌍이었기에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요한나의 실연은 딱하지만 속절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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