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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15. 2024

가을의 붉은 열매에서 봄의 흰 꽃을 믿기지 않아 하듯이


 올해는 산사 열매가 그리 풍성하게 열리지 않았다. 아마 꽃 필 즈음하여 평년보다 잦았던 비바람의 영향일 테다. 그래도 씨알이 굵고 빛깔 또한 선명하고 고와서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했다.


 사진을 찍고, 나무에 올라 표본을 채집하고, 간단한 메모까지 마친 문비가 다시 산사나무 아래로 간다. 연누른빛이 스며든 잎사귀들 사이 새빨간 열매는 매혹적이다. 무심코 손이 나간다. 그러나 산사나무의 찬란한 루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까치발을 해도 손이 닿지 않는다. 


 문비는 손을 위로 뻗은 그대로 제자리에서 펄쩍 점프한다. 기어코 열매 달린 잔가지 하나를 잡아챈다. 루비를 닮은 열매 하나를 따 작게 베어 물고 오물거린다. 시고 심심한 맛이다. 엄마와 함께 바로 이 나무에서 산사열매를 따 먹었던 두 해 전 가을날의 그 맛 그대로. 


 ‘정말 신기한 일이잖니? 이렇게 붉은 열매가 지난 오월의 눈처럼 하얀 꽃에서 왔다는 사실 말이야.’


 예전에 엄마가 했던 말이 문비의 귓전에 선하다. 


 ‘아아, 한결같은 우리 엄마. 지난 오월에는, 이렇게 하얀 꽃에서 그렇게 빨간 열매가 나올 거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단다, 그러더니만.’


 입가에 웃음을 문 채로 문비가 했던 대답. 


 ‘진심으로 신기하다니까. 살면 살수록 자연의 조화만큼 경이로운 게 없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지는구나.’


 문비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 해 오월에 엄마는 건강에 심상찮은 이상이 생겼다는 전조를 느꼈고, 가을에 여기에 왔을 때는 이미 암 진단을 받은 뒤였다는 걸. 


 알고 나서 결과적으로 돌이켜 보면 엄마의 언행에 별스러운 데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당시에는 전혀 못 느꼈었다. 


 엄마는 비밀 감추기에 굉장한 소질이 있었나 봐. 나 눈치 없는 편 아닌데도 까맣게 몰랐었으니까. 문비는 하늘을 향해 무언의 넋두리를 한다. 


 봄의 흰 꽃을 보면서 가을의 붉은 열매를 믿기지 않아 하듯이, 가을의 붉은 열매에서 봄의 흰 꽃을 믿기지 않아 하듯이. 엄마, 나는 그렇게 믿기지가 않아. 언젠가, 그러니까 그리 멀지는 않을 미래에 내가 아무것도 못 보게 되리라는 것이. 


 그런데 무서워. 믿기지는 않는데 어째서 두려움은 이토록이나 구체적이고도 생생할까? 


 있잖아, 엄마. 요즈음의 나는 엄마의 그 소질을 내가 물려받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나도 내 비밀을 꽁꽁 잘 숨기고 싶거든. 


 여기까지 생각하다 문비는 제풀에 화들짝 놀란다. 친엄마와 친딸이 아닌데 소질을 물려받는다는 말이 가당한가 싶어서. 놀라고 나서는 목 안쪽으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온다. 친엄마, 친딸. 이런 말을 떠올리는 자기 자신이 싫어져서. 그리고 서럽고 서글퍼서. 


 매애 매애, 가까운 곳에서 염소 소리가 들려 문비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밭일 하러 나오신 거예요?”


 문비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한실댁이 설기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산사나무 바로 옆이 한실댁의 배추밭이었다. 


 “오냐. 혼자 무슨 심사가 그리 깊어서 설기가 부르는 소리도 이제야 들었을꼬?”


 한실댁이 설기의 줄을 산사나무에 매었다. 설기는 문비 곁으로 가 또 매애 매애 한다. 평범한 염소 소리가 아니라 응석이 섞인 매애 매애 소리다. 설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소리를 낸다. 


 “아니에요. 그냥…….”


 “엄마가 보고 싶은 게지.”


 한실댁이 문비의 등을 느리게 쓸어 준다. 


 “아직 한참 그럴 때야. 문득문득, 울컥울컥. 보고 싶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고, 살고 죽는 게 다 뭣인지 당최 모르겠고.”


 문비는 엷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한실댁도 인자한 웃음을 띠고 몇 번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애도에 대한 안부를 마무리했다. 


 “배추밭에 물 주러 오신 거예요?”


 “그래, 맞다. 수분이 부족하면 배추가 속이 제대로 안 들거든.”


 “산사 열매 이제 다 떨어서 거두셔도 돼요. 저 오늘로 산사나무 관찰, 채집 다 끝냈어요.”


 산사 열매는 산사자라고 하여 한약재로 쓰인다. 동네에 몇 그루 있는 산사나무의 열매는 세 할머니가 공동으로 거두어 약재상에 내다 판다. 


 “그렇구나. 알았다. 보는 거 다 끝났으면 이제 가서 표본인지 뭔지 만들고 그림도 그려야겠구나. 어여 가거라. 가서 그림 이쁘게 잘 그리고.”


 옆에서 보고 주워듣고 해서 문비가 하는 일을 대강은 꿰고 있는 한실댁이 문비의 등을 떠밀었다. 


 “네.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너는 네 일 하고, 나는 내 일 하고 그러는 거지. 뭐가 죄송이여. 우리가 또 정 급하고 하면 도와달라고 하잖어. 얼른 가서 할 일 하거라.”


 “네, 할머니.”


 가려고 나서는 문비를 본 설기가 다급하게 매애 매애 울었다. 저한테 인사도 없이 가느냐고 나무라는 듯한 소리였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문비는 설기가 좋아하는 씀바귀를 찾아냈다. 비교적 연한 잎을 골라 한 움큼 뜯어 설기에게로 갔다. 설기는 문비의 손에서 씀바귀를 받아먹고는 기분 좋게 매애애 했다. 조공이 흡족하여 귀가를 허락하노라, 하는 것처럼. 


 “설기 너 그거 아니? 너 꽤 건방진 염소야.”


 설기는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쫑긋한 귀를 푸르르 털고는 깨끗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할머니! 저 이만 가볼게요.”


 한실댁은 밭의 반대편 가장자리에 가 있었다. 골짜기 작은 물길에 대어 놓은 호스로 물뿌리개에 물을 받는 중이었다. 한실댁이 손을 흔들어 잘 가라고 인사했다. 


 문비는 계절이 무르익은 산길을 자박자박 걸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빛을 내년에도 오롯이 두 눈에 담을 수 있을까? 눈 시리게 푸른 하늘을, 구름 사이로 뻗친 햇살을, 붉고 노란 단풍 산을, 냇물에 이는 은빛 물보라를, 정다운 내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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