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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10. 2024

필연적으로 쓸쓸한

 

 두 사람은 거의 경쟁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들깨가 베어지면서 나는 쓱싹 하는 소리, 들깻단을 쌓을 때 나는 싸르락 하는 소리, 저벅저벅 그리고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가 리듬감 있게 뒤섞였다. 


 “잠깐 쉬었다 해요.”


 문비의 제안에 라한도 밭가의 돌무더기로 왔다. 나란히 돌에 걸터앉아 미리 준비했던 물을 꺼내 마셨다. 물맛이 깜짝 놀랄 만큼 좋았다. 높은 산에서 솟는 물이라 원래도 맛이 좋지만 노동의 피로와 갈증이 그 맛을 더욱 돋우어 주었다. 


 “아아, 상쾌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문비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의 색감이 너무 쨍해서 마치 에니메이션 화면 같다. 


 “이런 속도라면 오후 서너 시쯤이면 끝낼 수 있겠는데요? 와 문비씨 진짜, 군더더기 없이 빠르고 꼼꼼하게 척척,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들깨 베기 전문 일꾼 데려다 놓은 줄 알겠어요. 뒤처지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기를 썼는지 모르죠? 힘들어 죽는 줄.”


 라한이 너스레를 떨자 문비가 풋 웃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낫질이 손에 익고부터는 라한의 낟가리가 살짝 더 빠르게 불어났던 것이다. 


 “여행은 조금만 더 뒤로 미룰게요. 먼저 말 꺼내 놓고 자꾸 기다리라고 해서 미안한데, 그림 작업 마감을 약간 당기게 돼서 일정이 빡빡해졌거든요.”


 양해를 구하면서 문비는 이렇게 되어 자신도 정말 아쉽다는 낯빛으로 작게 한숨을 쉰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기다리는 즐거움도 있는 거니까요.”


 배려가 담긴, 편안하고 둥근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다리는 즐거움을 너무 길게 누리고 싶지는 않고.”


 이렇게 덧붙임으로써 라한은 그녀와의 여행을 고대하고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기억해 둘게요.”


 때마침 뒤에 있던 생강나무에서 노랗게 물든 낙엽 몇 잎이 떨어진다. 문비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운 좋게 한 잎을 잡았다. 


 “잡았어요. 내가 잡았어요!”


 문비가 아이처럼 기뻐했다.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보고 있던 라한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짐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들고 두 엄지로 튕기기 시작했다. 


 피아노보다는 경쾌하고 오르골보다는 차분한 금속성의 소리에 실린 맑은 멜로디가 쾌적한 햇빛 사이로 동실동실 떠다녔다. 


 “이거, 본 적 있어요?”


 짧은 연주를 마친 라한이 물었다. 문비는 머리를 저었다. 저 자그마한 악기는 처음이지만 멜로디는 잘 아는 것이었다. 언젠가 문비가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흥얼거렸던 선율이었다.


 “꽤나 앙증맞은 악기네요.”


 “칼림바예요.”


 라한이 이름을 알려주며 악기를 건넸다. 받아 든 문비는 호기심을 가지고 요목조목 찬찬히 살핀다. 나무로 된 본체에 열일곱 개의 금속 건반이 달려 있다. 


 “이를테면 미니 피아노 같은 거네요.”


 문비가 건반을 튕겨 본다. 


 “맞아요. 엄지피아노라고도 하고 손가락피아노라고도 한다나 봐요. 소리는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듣기 좋아요. 정말.”


 화려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산뜻함, 문비가 들은 칼림바 소리는 그런 것이었다. 문비는 대번에 이 간소하고 귀여운 악기가 좋아졌다. 문비는 칼림바를 제대로 쥐고 라한이 했던 그대로 연주한다. 


 “작곡자가 직접 연주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나요? 난 문비씨처럼 절대 음감은 아니라서.”


 “정확했어요. 근데 그런 별 것 아닌 걸 기억해 둘 줄은 몰랐어요.”


 그걸 악기 연주로 듣게 될 줄은 더더욱 예상치 못했고. 그래서 문비의 기분은 묘했다. 쑥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사실은 악보로도 옮겨 놓았어요. 다른 뜻은 아니고, 혹시 내가 잊어버릴까 봐. 잊어버리기 싫었거든요.”


 “혹시 다른 것도 있어요? 내가 흥얼거렸던?”


 왠지 라한이 듣고 채보한 곡이 더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 묻는 것이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 무심코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노래 아닌 노래를 흥얼흥얼했던 적이 한 번뿐일 리 없었다. 


 “사실은 두 곡 더 있어요. 작곡자 가문비, 라고 써 놓았으니 저작권은 걱정 말아요.”


 라한이 사실대로 말하고 농담을 얹었다. 듣고 있던 문비가 피식 잔웃음을 웃어서 라한의 얼굴에도 웃음이 옮았다. 


 “들려줘 봐요. 어떤 것들인지 궁금해.”


 문비가 칼림바를 다시 라한에게 넘겨주었다. 라한은 두 곡을 차례로 연주했다. 


 “아아, 이런 거구나. 이렇게 들리는구나.”


 다 듣고 나서 문비가 중얼거렸다.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는 건 저 깜찍한 악기 덕분이겠지. 


 “피아노, 안 배웠다고 했었죠?”


 언젠가 스치듯 들은 기억에 의존해 라한이 물었다. 


 “네. 안 배웠어요.”


 엄마가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문비 자신도 꼭 배우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이 없었고. 이제는 엄마가 싫어했던 까닭도 이해한다. 피아노가 작곡과 교수인 아버지와 밀접한 악기였던 탓이라는 걸.


 “안 배웠어도 전혀 못 치는 건 아니죠?”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간단한 곡은 남이 치는 거 보고 외워서 흉내 내는 것 정도는 가능해요.”


 “예상 대로네요. 그거, 타고난 재능이에요. 아무나 못하는. 좀 전에 칼림바 치는 거 보고 그렇겠구나 싶었어요. 이게 간단한 악기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거 딱 한 번 보고 곧바로 그렇게 능숙하게 연주했잖아요.”


 문비는 라한의 말에서 필연적으로 아버지를 연상한다. 자신에게 정말 그런 재능이 있다면 그건 아버지 쪽의 내림일 테니까. 아버지를 떠올리면 문비는 어쩔 수 없이 마음자리가 불편하고 쓸쓸하고 이상해진다. 그러니까 어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실은 이 칼림바, 문비씨 주려고 가져 온 건데. 받아줄 거죠?”


 다행히 라한의 고백이 문비의 주의를 환기해 주었다. 


 “받고말고요. 처음 보는 순간부터 탐났어요. 달라고 해야지, 근데 안 준다고 하면 어쩌나, 하던 참이었어요. 고마워요, 라한씨.”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밀어 내느라 문비의 대답이 수다스레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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