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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08. 2024

잃고 싶지 않아


 문비는 한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깼다. 그 까닭이 꿈속까지 스며든 한기 때문인지 끔찍했던 꿈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훔치며 방금 꾸던 꿈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다시 잠들려고 애를 쓴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 까맣게 잊혀 있기를 소망하면서. 


 떨리는 몸을 이불로 푹 감싸고 눈을 감은 채 잠을 갈망했지만 허사였다. 방금 꾸던 꿈과 엄마에 대한 생각들이 마음을 찌르고 휘젓고 뒤흔들었다. 


 시각을 완전히 상실하는 꿈이었다. 배경은 엄마와 종종 바람 쐬러 가곤 하던 강가였다. 군락을 이룬 갯버들에 버들강아지가 풍성하게 피어 있었다. 


 엄마가 말했다. 저것 좀 봐라 이름처럼 귀엽고 예쁘지 않니? 엄마가 가리키는 쪽을 보려고 문비가 시선을 돌리는데 돌연 눈앞이 까매졌다. 


 눈을 깜빡거리고 비볐던 것 같다. 소용없었다. 엄마를 불렀던 것 같다. 엄마, 엄마? 아무런 대답도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 나 앞이 안 보여.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엄마! 팔을 들어 허공을 휘저으며 엄마를 찾아 헤맸던 것 같다. 


 발이 미끄러져 앞으로 고꾸라졌던 것 같다. 강에 빠지고 말았다. 가장자리여서 물은 얕았지만 얼굴이 물속 진흙 바닥에 처박혀 숨을 쉴 수 없었다. 주위로 물이 차올랐다. 기를 쓰고 발버둥쳐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밀도 높은 공포와 선득한 한기가 밀어닥쳤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싫은 꿈이었다. 


 어깨를 옹송그리고 이리저리 뒤척이던 문비가 결국 일어나 불을 켰다. 오지 않는 잠을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시야를 채우는 어둠을 견딜 수 없었다. 


 문비는 물 한 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평소 거의 켜지 않고 지내는 TV를 켰다. 리모컨의 채널 버튼을 차례차례 누르다 어느 다큐 프로그램에서 멈추었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지구의 모습에 멍한 눈을 고정한 문비는 다시 엄마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처럼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까. 엄마는. 크고 무서운 비밀을 안고 살면서. 언젠가 반드시 들키고 말 비밀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 웃을 일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던 엄마. 아주 작은 일이라도 웃어야 할 일 앞에서는 반드시 크고 환하게 웃던 엄마. 


 “아아, 이게 아닌데. 흠, 이거 정말 난감하게 됐구나.”


 위중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엄마의 첫 마디였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계획이었거든.”


 두 번째로 한 말인데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계획이 틀어진 게 더 큰 문제라는 투였다. 


 문비는 이제 엄마의 말에 숨은 뜻을 안다. 엄마로서는 정말 그랬던 것이다. 오래 살겠다던 계획이 틀어진 게 다른 어떤 것보다 애석했던 것이다. 오래오래 있어 주고 싶었을 테니까,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 살아가야 할 딸의 곁에. 


 울지 않기 위해 문비는 미간에 힘을 주고 입을 앙다물었다. 


 나 모르게 엄마도 많이 힘들었겠지. 괴로웠겠지. 그랬을 거야. 그런데도 엄마. 나는 엄마한테 화가 나. 그리고 막 억울해. 억울해 미치겠어. 잃고 싶지 않아, 눈으로 보는 세상을. 


 이제는 엄마를 기억할 때마다 줄기에 매달린 잎처럼 자연히 따라오는 궁금증이 있다. 생모 이설에 대한 궁금증. 


 어떤 것이었을까? 배 안에서 조금씩 커 가는 나를 품고 있던 그녀의 심정은. 마침내 세상에 나온 나의 첫울음을 들은 그녀의 기분은. 아직 작고 연약하기만 한 핏줄을 두고 저세상으로 가야 했던 그 마음은. 


 문비는 이 모든 과정에 엄마가 함께였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정인이 이설을 데리고 어디론가 숨었던 거라고. 그런데 어디로? 어디로 숨었던 걸까?


 한참을 어지러운 사념에 시달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소파에서 눈을 뜬 문비는 두통과 피로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꽤 중요한 일이 있어 게으름을 부릴 수 없는 날이었다. 


 문비는 누룽지를 끓여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두통약을 먹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러고는 생긋 웃었다. 웃음이 그늘져 보이는 것 같아서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방긋 웃었다. 눈이 덜 웃는 것 같아서 또 다시 활짝 웃었다. 눈도 휘고 웃음다운 웃음이었다. 좋아, 문비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문을 나섰다. 


 오늘은 들깨를 수확하기로 한 날이다. 내일 비 예보가 있어서 오늘 세 할머니의 들깨를 모두 베어 들여야 하는데 하필 흰돌댁이 딸네 집에 가고 없었다. 해외 출장을 간 딸을 대신해 손주들을 돌봐 주러 간 거였다. 그래서 라한과 은성, 문비가 거들기로 한 거였다. 


 한실댁과 내앞댁 그리고 은성은 나란히 붙어 있는 한실댁네 들깨밭과 내앞댁네 들깨밭을 맡고, 문비와 라한이 흰돌댁네 들깨밭을 맡기로 했다. 


 “어서 와요.”


 미리 와 있던 라한이 문비를 반겼다. 


 “연장은?”


 먼저 손에 낀 목장갑을 보여준 문비가 작은 마대자루에 넣어온 낫을 꺼내 날을 보호하는 덮개를 벗겨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연장이라면 잘 챙겨 왔죠.”


 저만치에서 라한도 목장갑과 낫을 들어 보였다. 


 “소문 들었죠? 내가 이 분야의 숙련된 경력직이라는 거.”


 들깨는 줄기가 부둑부둑 마르면 수확한다. 한 손으로 한 뭉치의 들깨를 잡아 쥐고 다른 손에 든 낫으로 베는데 비스듬히 돌리며 당긴다는 느낌으로 한 번에 힘을 가해야 한다. 서툴면 힘은 힘대로 들고 잘 베어지지 않으며 다칠 우려도 있다. 날이 선 낫은 꽤 위험한 도구다. 


 문비가 설명하며 몇 차례 시범을 보였다. 베어낸 들깻단은 옆에 펼쳐놓은 넓은 비닐 위에 쌓았다. 나중에 비닐 그대로 들어서 흰돌댁네 헛간으로 옮길 거였다. 거기 잘 두면 나중에 흰돌댁이 타작을 할 것이다. 


 “와아, 진짜 실력자였구나.”


 라한이 박수까지 치며 진지하게 감탄하는 바람에 쑥스러워진 문비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그가 보기 좋게 받아 냈다. 초콜릿이었다. 


 이날 흰돌댁네 들깨밭에는 고소함에 더해 달짝함과 쌉싸름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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