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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06. 2024

섣불리 재단하거나 함부로 동정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일요일 지나 월요일에 소년의 아버지가 연락을 해왔더구나.”


 잠시 말을 멈춘 소혜 여사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얼음이 녹아 묽고 밋밋해진 위스키가 어쩐지 입맛에 썼다. 


 “의외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산골 토박이가 아니라 이런저런 슬프고 괴로운 일들을 겪는 바람에 세상 꼴이 보기 싫어져서 아직 아기였던 아들들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간 거였지.”


 듣고 있던 라한은 조금 씁쓸해졌다. 이후의 전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년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때문에 할머니가 통례를 벗어난 파격적인 보상을 제시했으리라는 걸.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과 달리 산을 떠남에 미련이 없었으리라는 걸. 


 “그렇게 그들은 산을 떠나고 스노우베어는 차질 없이 착공을 했고요?”


 과연 할머니가 미리 말했던 대로 그리 특별한 사연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한은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낯설고 당당하고 순진한 소년과의 만남을 혼자 간직하고자 했던 할머니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그랬지. 그러고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느리게 대답한 소혜 여사가 마당 가장자리 바닥에 드문드문 놓인 태양열 조명을 보며 잠시 틈을 두었다. 


 노란 빛을 발하는 구형의, 해 같이 따스하고 달 같이 은은한 빛을 지닌 조명등. 소혜 여사는 저 등과 라한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저 아이가 최적의 인물일 수밖에. 새롭게 거듭날 스노우베어를 맡기기에도. 밀봉했던 기억을 나누기에도. 


 라한은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게 다가 아님을 예감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다래라는 열매에 계시씩이나 되는 수식이 붙기에는 아직 곡절이 부족했기에. 


 “스노우베어를 다른 형태로 바꾸겠다고 결심한 지는 몇 년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결심을 하고부터 가끔씩 꿈에 나오더구나. 그 소년이. 다래를 따 주던 그 장면이.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완전히 잊고 살았었는데 말이다.”


 처음 한두 번 정도 꿈을 꾸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여러 번 되풀이 꾸다 보니 마음이 쓰였다. 소혜 여사는 전직 형사 출신의 탐정을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소년을 찾아봐 달라고. 어느덧 중년이 되었을 소년을. 


 “그저 근황 정도만 알고 싶었다. 정말 그게 다였어.”


 적어도 보통의 삶 밖으로 벗어나 있지는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없더구나. 없었어.”


 “찾지 못한 건가요?”


 모호한 표현을 들으며 라한은 그가 이민이라도 간 것일까 추측해 본다. 


 “산을 떠나고 채 몇 달도 살지 못했다고 했다.”


 경악스럽고 허망한 사실에 라한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애달픈 눈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소혜 여사는 나직나직 말을 이었다. 


 “독감, 독감으로 죽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이날 이때껏 주위에서 본 적은 없었는데…… 그 푸르던 생명을 앗아간 게 겨우 독감이었다고…….”


 독감 이전에 소년은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렸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이가 생기를 잃은 까닭이 향수병이라는 걸 몰랐다. 도시 생활이 낯설고 어색해서 그러나 보다, 적응에는 시간이 약이지 했다. 그는 도시에서 다시 시작한 전파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소혜 여사가 고용한 탐정도 소년의 향수병까지는 정탐해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소혜 여사가 받은 조사 보고서에도 향수병은 없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챕터는 소년의 죽음 이후 쌍둥이 형과 아버지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옛 이웃 몇의 구술이 녹취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그들 부자가 크나큰 슬픔과 상심으로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는. 확실치는 않으나 아주 머나먼 이국땅으로 갔을 거라는.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오래 전 그날과 비슷한 상황으로 다래가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에야 깨달았단다.”


 소년의 마지막을 알고 난 직후부터 소년과 다래에 얽힌 기억이 아프고 무거운 것으로 변질되어 있었음을. 그 기억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졌음을. 고이 어루만지고 덜어냄으로써 다시 살뜰하게 품고 갈 수 있도록. 


 하여 소혜 여사는 그 기억을 털어놓기로 작정했다. 섣불리 재단하거나 함부로 동정하지 않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성심으로 간직해줄 누군가에게. 즉 라한에게. 


 테이블 위에 깍지 끼고 있던 소혜 여사의 손을 라한이 한 손을 뻗어 살며시 감싸 쥐었다. 소혜 여사가 하늘에서 시선을 내려 라한을 보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손자가 문득 하염없이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 좀 궁금해지지 않았니? 내가 스노우베어를 어떻게 변모시키려고 하는지?”


 “궁금해요. 하지만 아셔야 해요. 오직 순수한 궁금증일 뿐이에요.”


 “일단 알겠고. 실은 스노우베어를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 다시 숲으로, 산으로.”


 “예에?”


 라한은 앉은 자리에서 튀어오를 뻔했다. 할머니의 선언은 스노우베어 GC의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를 고스란히 소멸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철거 비용과 조림 비용까지 써 가면서. 


 “어제도 말했지만 노망 든 거 아니니 그런 얼굴 할 거 없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가족들이 반대할 걸 아시면서 정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어디 말해 봐라. 너도 반대니? 다른 건 아무것도 고려하지 말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말해 봐. 가질 만큼 가진 어떤 노인네가 자기 소유의 골프장을 뒤엎어서 숲과 산으로 만들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치면?”


 라한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소혜 여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엷게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은성이도 반대는 안 할 거다. 다만 다른 식구들 눈치가 보여 찬성이라고도 못 하겠지. 그렇지 않니?”


 욕심 없고 착한 은성이니까 정말 그럴지 모른다. 라한은 이번에도 대답 대신 애꿎은 머리칼만 쓸어 넘겼다. 


 “스노우베어를 만든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때는 골프장은 적었고 산과 숲은 많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잖니. 스노우베어 하나쯤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괜찮지.”


 “좋은 일인 건 알아요. 하지만 저는…….”


 소혜 여사가 손을 들어 라한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온유하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 나는 이제 막 씨앗을 심었을 뿐이라고. 씨앗마다 발아를 위해 필요로 하는 시간이 다르다고.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려 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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