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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13. 2024

한 번은 꼭 사무치게 그리워질


 점심은 은성과 두 할머니가 일하고 있는 저 아래의 밭에 가서 다 함께 먹었다. 비빔밥과 국수에 막걸리도 딱 한 사발씩 나누어 마셨다. 볕은 유순하고 오가는 말들은 달근달근했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사무치게 그리워질 시간이었고, 누구도 그걸 지금 깨칠 수는 없기에 시간과 함께 아름답게 채색되어 갈 풍경이었다. 


 점심 먹은 자리를 정리하는데 하늘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일의 비 예보를 강조라도 하듯 구름이 흘러들었다. 


 “하던 일 얼른 끝내라고 하늘이 재우치네.”


 모여드는 구름을 본 내앞댁이 말했고.


 “그러게 말이야. 부지깽이도 덤비는 가을이라고, 이리 일손 급할 때 젊은 사람들이 선뜻 나서서 도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빠른 손놀림으로 빈 그릇들을 광주리에 척척 담으며 한실댁이 받았다. 


 은성이 문비와 라한에게 어서 서두르라고 손짓했다. 문비와 라한은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기 무섭게 잰 걸음으로 비탈길을 올라 흰돌댁네 밭으로 돌아갔다. 약속이나 한 듯 곧바로 들깨 베기에 돌입한 두 사람은 묵묵히 그리고 오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일했다. 


 서로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둘의 속내는 같았다. 최대한 신속하게 이쪽 일을 끝내고 저쪽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저쪽 들깨 베기를 저녁때까지 끝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심을 먹으면서 살펴본바 저쪽 밭의 진척 상황이 예상보다 느렸던 것이다.


 밭의 들깨를 다 베어 흰돌댁네 헛간까지 날라 놓은 문비와 라한이 저쪽 밭으로 갔다.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거기서 일하던 세 사람은 깜짝 놀라는 동시에 반가워했다. 셋이 하던 일을 다섯이 하게 되니 밭의 들깨는 눈에 띄게 줄어 갔다. 


 다행히 하늘이 완전히 구름으로 뒤덮이고 어둠이 내리기 전에 내앞댁과 한실댁네 들깨도 모조리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은성과 문비, 라한은 청회색 땅거미가 내리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에 젖은 몸은 여기저기 쑤시고 무겁고 나른했지만 기분은 가볍고 뿌듯했다. 하늘은 흐린 잿빛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코스모스와 구절초와 물매화의 자태는 별처럼 도드라졌다. 


 “문비씨, 이것 좀 봐. 아아, 곱고 애잔해라. 이건 무슨 꽃이지?”


 길가의 덤불 사이에 핀 조그맣고 하얀 꽃을 발견한 은성이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문비가 가까이 가 은성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물매화. 이름도 생김새랑 꼭 어울리죠?”


 “물매화라니. 이렇게 예쁜 이름이라니. 그러고 보니 정말 매화를 닮았어.”


 라한은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저만치 혼자 떨어져 있었다. 길가에 나란히 쪼그려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고는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게 감탄하는 두 여자를 보는 그의 눈에도 물매화 같은 빛이 일렁였다. 


 “어? 저쪽에 고마리 꽃도 있어요, 언니.”


 문비가 은성의 손을 잡아끌고 덤불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 고마리의 꽃들이 약소하나마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분홍 점 찍힌 작디작은 흰구슬 여러 개를 엮어 놓은 듯한 꽃을 보고 은성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고마리라고 했지? 마치 보석 같다.”


 즐거워하는 은성의 모습을 보며 문비는 그녀야말로 꽃 같다고 생각했다. 작은 보석 같은 고마리나 청초하고 귀여운 물매화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이제 그만 가자. 내일 다시 보러 와야겠어. 빗속의 고마리와 물매화는 또 얼마나 애틋하고 예쁠까.”


 은성이 먼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덤불을 벗어났다. 


 “내일도 같이 보러 와요, 우리.”


 문비도 몸을 펴 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하필 그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문비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몸이 굳었다. 눈을 깜빡이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는데 은성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 


 “왜그래, 문비씨?”


 걱정스레 다가오는 은성을 향해 문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덤불 밖을 향해 발을 내딛다가 다시 한 번 오른쪽 시야의 이상을 느꼈고, 안 보여서가 아니라 닥쳐오는 앞날에 대한 경악과 공포 때문에 발을 헛디뎠다. 재빨리 몸을 낮췄으나 넘어지고 말았다. 


 “문비씨! 괜찮아?”


 “괜찮아요?”


 놀란 은성이 외치듯 묻고 라한도 즉시 달려왔다. 문비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덤불에서 나왔다. 왼 손바닥에 쓰라린 통증과 함께 이물감이 느껴졌다. 문비가 손을 들어 살피자 라한이 핸드폰 조명을 비추었다. 


 “어떡해, 다쳤네. 피 좀 봐.”


 은성이 애처로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에요. 둘이 덤불로 들어가는 걸 봤을 때 바로 와서 조명을 비춰 줬어야 하는 건데. 통화는 나중에 해도 되는 거였는데.”


 라한은 자신이 좀 더 세심하지 못했던 탓인 것만 같아서 안타깝고 미안했다. 


 “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닌 걸요, 뭐.” 


 손바닥을 파고 든 작고 날카로운 돌 조각을 빼 옆으로 던진 문비가 덤덤하게 말했다. 


 “피가 좀 나고 있긴 한데 누르고 있으면 곧 멎을 거예요. 이 정도 상처는 다들 나 봤잖아요. 별 거 아닌 거 알잖아요. 나 진짜 괜찮다니까요?”


 문비는 씩씩하고 밝았다. 손의 상처에 대해서라면 문비는 진실로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건 한동안 보이지 않던 시력 상실의 전조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는 거였고, 이 증상에 대해서는 솔직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이렇게 억지로라도 굳세고 활달할 밖에.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라한이 손수건으로 조심조심 상처를 싸매 주었다. 


 “많이 아프진 않아? 참을 만해? 빨리 가서 약 바르자. 가만, 병원은 안 가도 되는 걸까? 상처 안에 모래 같은 거 들어가진 않았을까?”


 은성이 문비의 등을 다독이면서 묻고 또 물었다. 


 “진짜 진짜 괜찮아요.”


 살뜰한 마음을 써 주는 두 사람이 문비는 정말이지 고맙고 소중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어서 집으로 돌아가 혼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지금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마음자리가 착잡하고 혼란하게 얼크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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