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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17. 2024

12월의 비 5월의 난초


 주말 오후의 백화점은 다종다양한 제품만큼이나 다채로운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다. 문비는 대형 백화점의 공중 정원 어느 벤치에 앉아 있다. 통유리 너머로 층층이 다른 주제로 꾸민, 삼단 케이크 같은 중앙 조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사람 구경은 백화점 주차장에서부터 공중 정원까지 올라오면서 한 것으로 충분했다. 문비도 처음 아주 잠깐은 인파 속에 섞여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을 즐겼지만 오래지 않아 급속도로 피로해졌다. 


 사람에 치이는 걸 좋아하지 않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스트레스 때문일 터였다. 출생에 얽힌 비밀과 아버지의 건강 그리고 문비 자신의 시력 문제. 하나만으로도 중대하고 심각할 스트레스 요인이 삼중으로 그녀를 옥죄고 있었으니까. 


 약속 장소를 정원이 있는 백화점으로 정하기를 잘했다고, 문비는 안도한다. 적당한 간격으로 식재된 나무와 관엽식물, 스프링클러가 분사하는 물을 머금은 화초들, 갓 깎은 잔디에서 나는 풀냄새.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아슬아슬 날 선 신경을 무엇으로 누그러뜨려야 했을지. 


 깊은 숨을 쉰 문비는 입구 쪽을 일별한다. 곧 세진이 올 것이다. 


 오늘 세진과 있는 동안만이라도 다 잊자고, 앞일이니 미래니 하는 것들은 생각하지 말자고, 문비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둔다. 세진에게조차 들키고 싶지 않다. 아직은. 아직은? 아직은, 인가? 영영이 아니라?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문비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린다. 


 “문비야아.”


 반색하며 부르는 나지막한 소리에 문비는 화들짝하여 일어났다. 


 “세진아아.”


 문비도 소리 낮추어 불렀다. 그 사이 달려온 세진이 문비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이 두 여자를 힐끔거렸다. 팔을 푼 두 여자가 마주보고 킥킥 웃고는 정원을 나가 의류 매장으로 향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같이 쇼핑하는 거.”


 화사한 원피스를 골라 문비에게 대보며 세진은 감회에 젖었다. 


 “그러게. 너무 좋다. 오래간만에 너랑 이러고 노는 거.”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물리며 문비가 말했다. 


 “이건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지? 어디 보자, 오, 이거. 이거다. 이건 안 대봐도 알겠어. 딱 네 거네. 입어 봐, 빨리.”


 미색의 정갈한 상의에 연한 스모키쿼츠 빛깔의 풍성한 샤스커트가 매치된 투피스를 발견한 세진은 자신 있게 문비를 탈의실로 들여보냈다. 


 “어때? 괜찮아?”


 옷을 갈아입고 나와 거울 앞에 선 문비가 몸을 이리저리 돌려 태를 확인하며 세진의 의견을 구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아주 예뻐! 멋져! 근데 말이지, 가문비씨.”


 문비의 어깨에 얼굴을 얹다시피 한 세진이 거울 속 문비와 눈을 맞추고는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갑자기 이런 고품격 의상을 찾으시는 까닭이 있으실 텐데요? 그 까닭이 대체 뭘까요?”


 “까닭은 무슨 까닭. 그냥 예쁜 옷 한 벌 사고 싶어졌을 뿐이야. 왜, 그럴 때 있지 않니? 괜히 예쁜 거에 혹하는 때 말이야.”


 정곡을 찔렸지만 문비는 아닌 척 천연스레 둘러댔다. 실은 라한을 염두에 둔 소비였다. 


 여행지에서 한 끼 정도는 격식을 차린 식사를 하며 차분하고 우아한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그런 모습도 보여주고 또 보고 싶은 마음. 그와 공유하는 시간 속에 얼마간 색다른 분위기의 추억도 새겨 넣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각각 옷 한 벌씩을 산 다음 문비는 세진을 화장품 매장과 액세서리 매장으로 차례차례 이끌었다. 자신이 지금 예쁜 것에 혹해 있다는 연기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세진은 기꺼이 문비의 연기에 넘어가 주었고 탐미의 즐거움에 동참했다. 


 “세진아, 이것 좀 봐봐.”


 조금 떨어져서 진열대를 구경하던 세진이 문비에게로 왔다. 문비가 가리킨 것은 브로치였다. 


 “네가 봐도 이거 연영초 맞지?”


 세 개의 꽃잎과 꽃잎 사이사이로 튀어나온 세 개의 꽃받침 모양이 틀림없는 연영초의 형상이었다. 꽃잎은 문스톤, 꽃받침은 페리도트.


 “맞다. 정말 연영초네. 페리도트 연영초라니, 너 차암 이쁘구나.”


 페리도트는 팔월 생인 세진의 탄생석이었다. 황홀한 낯빛으로 브로치를 감상하는 세진을 문비는 다정한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페리도트, 투명한 연두의 빛. 내가 보는 너는 늘 그런 빛이었지. 


 시간을 확인한 세진이 이만 나가자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문비도 짚이는 바가 있어 순순히 따라나섰다. 


 “우리 현민씨 보여줄게. 너한테 맛있는 밥 사겠다고 너 오기만 기다렸다는 거 아니니.”


 “세상에, 우리 현민씨래. 한세진이가 연애를 하더니 오글토글 열매를 먹었어.”


 문비가 닭살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놀렸다. 세진은 이 정도 놀림에는 끄떡없다는 듯 생글거리기만 했다. 


 “밥은 내가 사야지. 똑똑하고 빈틈 많은 우리 한세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그래? 이거 기대되는데? 우리 현민씨와 우리 문비의 밥값 대전. 과연 이 치열한 싸움의 승자느으으은?”


 세진이 연극조로 말하는 바람에 문비도 웃음이 터졌다. 


 현민은 인상 좋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밝고 엉뚱한 농담을 구사하고, 세진에 대한 묵직한 진심을 보여주고, 문비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덕분에 식사 자리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마침내 결전의 시간, 카운터로 가는 현민을 문비가 재빨리 앞질렀다. 그러나 카드를 내미는 건 뒤에 있던 현민이 빨랐다. 문비가 민첩하게 그의 카드를 빼앗고 자신의 카드를 꺼냈다. 세진은 두어 걸음 물러나 웃음을 참으며 관전 중이었다. 


 카운터에 서 있던 나비넥타이의 노신사가 문비와 현민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아래쪽에서 무언가를 들어 올려 카운터 위에 놓았다. 사람 손이 하나 들어갈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는 나무 상자였다. 노신사가 문비와 현민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상황을 파악한 문비와 현민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짓으로 합의가 되었다. 문비가 먼저 나무상자에 손을 넣었다. 그녀의 손이 상자 안에서 맞닥뜨린 건 화투장이었다. 문비는 그것을 보이지 않게 감싸 쥐고 꺼냈다. 현민이 상자에 손을 넣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동시에 노신사에게 자신의 패와 카드를 내밀었다. 문비의 패는 12월 비, 현민의 것은 5월 난초였다. 노신사는 ‘높은 수 당첨’이라고 말하며 문비의 카드를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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