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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Jul 22. 2024

소녀와 라일락


 몇 번인가 출입문이 열렸다 닫히고 낯선 얼굴들이 라한의 시선을 비껴 지나갔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고 그의 기다림은 아직 푸르고 환했다. 언젠가 문비와 함께 보았던 바다의 빛처럼. 


 다시 문이 열리고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들어왔다. 라한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소녀가 라한의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저, 이거요.”


 무미건조한 표정의 소녀가 흰 봉투를 테이블에 놓았다. 라한은 물음표를 그린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보았다. 


 “누가 전해 주라던데요.”


 “누가……?”


 “나도 모르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무튼 부탁 받은 대로 전해 줬으니 전 이만.”


 무뚝뚝하게 대답한 소녀가 휭하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 멍해 있던 라한이 재빨리 봉투를 집어 들고 일어나 소녀를 쫓아갔다. 


 “부탁한 사람, 젊은 여자였지? 어떻게 생겼어? 아니, 어디서 만났니?”


 앞을 가로막고 황망하게 묻는 라한을 응시하는 소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소녀는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라한을 올려다봤다. 


 “아, 미안. 급한 마음에 그만…….”


 소녀의 태도를 길을 막은 데 대한 항의의 뜻이라고 생각한 라한이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며 사과했다. 그러나 소녀는 발을 내딛지 않았다. 소녀는 뭐가 뭔지 감을 잡은 느낌이었다. 본의 아니게 남의 연애사에 엮여 버린 감상이라면, 제법 흥미로웠다. 


 “지금 가도 못 만나요. 저한테 그 봉투 부탁하고 바로 차로 쌩 떠났으니까.”


 딱하다는 투로 알려주고도 소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발머리였어요, 그 언니. 생긴 건 뭐 대충 피부 깨끗하고, 화려하지 않은 쪽으로 예쁘고. 어때요? 아저씨가 생각하는 그 사람 맞아요?”


 한층 너그러워진 낯빛으로 소녀가 말했다. 


 “그래, 맞아. 고맙다.”


 맥없이 대답한 라한이 터벅터벅 출입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서는 아무런 작정도 없이 그저 걸었다. 


 “아저씨, 아저씨!”


 몇 번이나 부르는 소리가 겨우 귀에 닿고 라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뛰어오는 소녀의 손에 그의 검자줏빛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카페 테이블에 앉으면서 풀어 두었던 거였다. 


 “이거 아저씨 것 맞죠?”


 머플러를 받으면서 라한이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소녀가 말을 가로챘다. 


 “아저씨 지금 막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그래요?”


 지나치게 사적인 질문이었다. 무람없고 당돌하고, 예리한.


 라한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는 애수가 배어나는 쓴웃음이었다. 소녀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 시절의 특권이겠지. 거리낌 없는 순수함도, 무서운 것 없는 솔직함도. 


 묵묵히 다시 걷는 라한을 소녀가 종종걸음을 쳐 따라왔다. 


 “맞네요 뭐. 자, 이거 아저씨 가져요. 내가 특별히 선심 쓰는 거예요.”


 지갑을 꺼내 뒤적뒤적하던 소녀가 네모나게 접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라한은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나도 원래는 성격 좋은 애 아니거든요? 초면에 이런 거 막 주고 그런 오지라퍼 아니라고요. 근데 내가 오늘따라 측은지심이 들어서 그래요. 측은지심이. 아까 보니까 그 언니도 되게 슬퍼 보이고 그래서.”


 문비가 무척 슬퍼 보였다는 말이 라한의 발을 잡아 멈추게 했다. 


 “아니 그렇게들 슬프고 막 세상이 무너지고 그럴 거면서 왜……?”


 숨을 몰아쉬던 소녀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이었다. 


 “그래서 주겠다는 그게 뭔데?”


 “아 이거요? 이게 럭키 라일락이라는 건데요.”


 소녀는 꼼꼼히 접힌 종이를 펼쳐 라한에게 보여주었다. 보드라운 헝겊에 싸인 마른 꽃은 아직 보랏빛이 남아 있는 라일락이 맞았다. 


 “럭키 라일락?”


 “보세요. 꽃잎이 다섯 개로 갈라진 꽃이잖아요. 보통 라일락은 네 갈래인데.”


 “이걸 왜 주겠다는 건데?”


 “다섯 꽃잎의 럭키 라일락을 삼키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소녀의 마음이 고맙고 귀여워서 라한은 순간 유쾌하고 멋쩍게 웃었다. 


 “받은 걸로 치자. 잘 가라.”


 돌아서는 라한의 주머니에 소녀가 꽃잎 든 종이를 쏙 밀어 넣고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소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어느 건물 모퉁이로 사라졌다. 


 라한의 손에는 문비가 주었다는 봉투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손이 빨갛게 얼고 있었고 가슴이 아리게 조여 왔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화인을 새기듯 선명했다. 날카로운 상실감, 살을 에는 추위, 하얗게 흩어지는 덧없는 입김조차... 



 전시실 안은 포근하고 쾌적했으며 그림들이 적절한 간격을 두고 걸려 있다. 색연필 혹은 수채물감으로 그린 식물세밀화들은 눈이 편안하면서도 아름답다. 


 문비는 전시를 관람하면서 세진의 퇴근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 점 한 점의 그림 앞에 이전보다 오래 머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머지않아 이 아름다운 그림들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오히려 또렷이 부각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분야를 업으로 삼을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뻐했던가. 문비는 식물학 그림이 정말이지 좋았다. 섬세하게 보는 것도, 정밀하게 그리는 것도. 그러니 시각과 그림을 한꺼번에 잃게 되리라는 건 문비에게는 모든 걸 잃으리라는 선고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 문비가 보고 있는 건 개암나무 세밀화다. 푸르고 넓은 잎을 단 가지와 소담한 열매, 앙증맞게 붙어 있는 암꽃, 소박하게 늘어진 수꽃. 보고 있자니 깨금이 생각이 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그 유순하고 관대하고 잘 웃는, 사랑 많은 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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