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Jul 19. 2024

내 평안을 쥐고 있는 사람


 폭설 뒤에 찾아온 맹추위 속에 한 해의 끝자락이 성큼 다가들었다. 산속 마을의 다섯 주민은 매일 시간을 정하고 모여서 서로의 집과 집을 잇는 도로와 작은 길의 눈을 치워나갔다. 며칠에 걸쳐 다 함께 땀 흘린 덕택에 연말이 되기 전에 제설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종아리가 푹푹 빠지도록 쌓인 눈이 서로의 왕래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긴 레인부츠 혹은 농사용 장화를 신고서는 갓 만든 간식을 전해주기 위해 혹은 그저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기 위해 서로의 집을 오갔다. 


 은성과 라한은 처음으로 설피를 신어 보았다. 세 할머니는 두 사람을 위해 탄력이 좋은 다래나무와 질긴 칡넝쿨로 설피 만드는 과정도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모두가 설피를 신고 곡식과 채소가 든 자루를 메고 산을 올랐다. 눈 때문에 먹이 활동을 하기 힘들어진 산짐승들이 있을지도 몰라서였다. 산짐승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나 다닐 만한 길목을 찾아서 가지고 간 곡식과 채소를 조금씩 뿌려 두었다. 


 아쉽게도 노루나 산토끼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함께 눈 쌓인 산을 설피를 신고 오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다 비운 자루를 하나씩 깔고 눈 속에 앉아 나누어 마신 한 잔의 커피는 눈앞에 펼쳐진 눈꽃의 숲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가 되었다. 



 - 그 순간 여기에 문비씨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서로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듯이 할머니들께서도 문비씨 얘기를 꺼내셨어요. 문비씨가 없어서 우리는 콩알 하나가 비어 버린 콩꼬투리라고. 많이들 기다리시는 눈치예요. - 



 라한은 그날 문비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바쁜 사정이 있나 보다, 스스로를 타이르며 참고 기다리다가 전화를 걸어 본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제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초조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라한은 핸드폰을 들고 몇 번이나 메시지를 쓰다 지우고 쓰다 지웠다. 라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머리가 아닌 손이 고른 연주가 끝나자 문이 열리고 은성이 들어왔다. 


 “아아, 바흐는 역시 좋다니까. 바흐는 꽤 오랜만이네? 최근에는 계속 내가 모르는 곡들만 켜더니?”


 은성이 모르는 곡들이란 문비가 만든 것들이었다. 라한이 방금 연주한 곡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이었고.


 “물론 내가 모르는 그 곡들도 좋았어. 진짜야.”


 “의도하지 않았는데 무심결에 그 곡이 나왔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던 단 하나의 클래식 악곡인데.”


 말하면서 라한은 깨달았다. 친부의 기일이 머지않았음을. 


 “곧 기일이지? 그래서인가 보다.”


 은성이 말하면서 탁상 달력을 넘겨 확인했다. 


 “1월 4일이구나. 갈 거지?”


 “가야지.”


 어머니가 기다리실 테니까. 


 석란이 재혼한 다음부터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대신 모자가 나란히 납골묘를 방문함으로써 기일을 챙겼다. 석란도 라한도 이 방식이 마음 편했고, 모자 단 둘이서 고인을 마음껏 추억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저녁 먹자고 부르러 왔어. 가자.”


 은성을 따라 본채로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작업실로 온 라한은 한결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시 문비와의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 연결은 되지 않았다. 라한은 문비에게 전할 길지 않은 메시지를 꽤 시간을 들여서야 완성했다. 



 - 1월 4일이 아버지 기일이라 본가에 갈 거예요. 전날 가서 기일 뒷날 돌아올 예정인데 그 사이에 봤으면 해요. 며칠 째 소식도 없고 통화도 연결이 되지 않으니까 솔직히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걱정이 좀 돼요. 괜찮은 거예요? 내 평안을 쥐고 있는 당신이 평안하기를... -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진심을 오롯이 전할 수 있는 짧은 전언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체감하면서 라한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답신은 다음날 새벽 라한이 잠을 깨기 전에 와 있었다. 


 - 그때 볼 수 있게 되면 내가 연락할게요. 일이 좀 있긴 하지만 나는 비교적 잘 있어요. 그러니 염려하지 말아요. - 


 어둠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손을 뻗어 메시지를 확인한 라한은 한참 동안이나 문비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가웠고, 다행스러웠고, 그녀가 더욱 그리워졌다. 그러고는 가슴 한구석에서 까닭 모를 초조감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메시지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랐다. 글자들이 미세하게 뒷걸음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본가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 라한은 표 안 나게 애를 태웠다. 어서 시간이 가서 문비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다가도 막상 그때가 되어 문비가 볼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라한은 본가로 가던 길에 문비의 메시지를 받았다. 


 - 6일 오전 11시에 봐요. 장소 지도 첨부할게요. 지금쯤 본가로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조심히 와요. -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라한은 얼마간 안도했다. 만나면 그녀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 것이다. 그녀에게 고충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감당할 것이다. 지레 불안할 것도 초조할 것도 없는 것이다. 


 약속 당일, 라한은 약속한 시간보다 이르게 문비가 지정한 장소에 도착했다. 한쪽 벽이 여러 개의 통유리로 된 카페였다. 차분하게 앉아 바깥 풍경을 보던 라한이 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댔다. 거기 안주머니에 든 것을 떠올리는 라한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투명한 잔에 담긴 물로 긴장을 달래며 라한은 어떤 음악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가 문비에게 제안했던 겨울 여행에서 들으러 갈 음악, 누구라도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들을 수 없는 음악. 단 한 번의 연주가 끝나면 그뿐, 두 번 다시 같은 선율을 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음악. 


 문비에게 그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 그가 겨울 여행을 제안한 이유였다. 


 지금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다. 건너편 3층 미술 학원 유리창에 쳐진 커튼 뒤에서 문비가 자신을 건너다보고 있다는 것을. 


이전 14화 내부의 무언가가 조용히 꺼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