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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다움 Jun 12. 2024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자

 초등학생 때 가을운동회에서 반 대표 이어달리기 선수로 나간 적이 있다. 거기다 나는 첫 번째 주자였다. 쨍한 형광색의 바통을 들고 약간의 긴장과 흥분을 느끼며 다른 반의 첫 번째 주자들과 함께 출발선에 섰다. '탕'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가벼운 몸에 꽤나 빨랐던 나는 1등으로 산뜻한 출발을 하였다. 운동장의 반바퀴 정도를 뛰고 코너를 돌던 순간 바짝 따라오던 옆반의 아이가 더 안쪽으로 뛰려고 내쪽으로 다가왔으며 순간 나는 균형을 잃었다.

철퍼덕.

한쪽 무릎을 땅에 찧고는 민망한 자세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새도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땅에 떨어진 바통을 훔치듯 줍고는 다시 트랙을 따라 뛰었다. 내가 넘어지는 사이에 이미 다른 반 아이들은 모두 나를 제쳐가 있었다. 내가 바통을 넘겨줘야 할 우리 반의 다음 타자였던 친구는 앞으로 미리 많이 나와서 일찌감치 봉을 건네받아서 뛰었다. 바통을 건네주고 난 후에야 나는 넘어졌던 아픔도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수치심도 올라왔다. 땅에 쓸린 팔과 다리에서 욱신함이 느껴졌고 땅에 찧은 무릎에서는 축축한 것이 피가 느껴졌다.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나는 이어달리기의 시작을 꼴찌로 바통을 넘겨주 되었지만 다행히 뒷 친구들이 엄청 잘 뛰어주어 그날 우리 반은 어달리기 1등을 하였다. 경기종료 후 울음이 터진 나를 반 아이 전체가 '괜찮다, 잘했다, 우리 1등도 했다'며 위로하고 치켜주었던 슬프지만 따뜻했던 추억이 생각난다.

이어달리기 경중에 넘어졌을 때 아파할 새도 없고 쓰러져있을 틈도 없다. 바로 일어나서 다시 뛰어야 한다. 내가 만약 쓰러진 채로 다친 무릎을 안고 있었다면 뒷친구들이 아무리 잘 뛰었어도 반 1등은 어려웠을 터이다. 그래서 비록 넘어졌지만 바로 일어서서 달렸기에 조금 덜 부끄럽다.

하지만 인생은 달리기가 아닌걸.
정해진 코스를 뛰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몇 초, 몇 분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빨리 달리는 것이 목표도 아니고
바통을 넘겨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도 아니고
이기고 지고의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넘어졌던 이어달리기'와 '지금 넘어진 인생'은 좀 다르다.

인생에서 넘어졌을 땐 좀 아파하기도 하고 상처를 좀 살펴보기도 해야 한다.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오랜 버팀에 지쳐 쓰러지기도 한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일에 고꾸라지기도 하고

큰 파도에 휩쓸려 내동댕이 쳐지기도 한다.


쓰러진 김에, 넘어진 김에, 엎어진 김에
그냥 철퍼덕 누워있자.

힘내라는 말은 사양한다.
빨리 이겨내라는 말도 거부한다.
우린 그냥,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자.

우린 길고 긴 인생을 살고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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