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서스 Nov 12. 2024

[프롤로그] 헬로비전에 대한 기억

(제가 예전에 썼던 'RPG 레드오션 투쟁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LG헬로비전이고 과거에는 CJ헬로비전으로 불렸던 회사. 그리고 한 때는 SK헬로비전이 될 뻔 했던 회사.


저는 그 회사에 2012년 10월 15일부터 2016년 10월 14일까지 다녔었습니다. 의도적으로 4년을 맞추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다니다 보니 날짜수로 4년 꽉 채우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들었고 가장 일을 많이 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주말에 출근하는 날도 많았고 새벽 4시에 퇴근했다가 2시간 잔 후에 다시 6시에 출근했던 적도 있었죠. 거기에 출퇴근길이 겁나 멀어서 매일 출근에 1시간 40분 / 퇴근에 2시간 소모하면서 다녔었구요.


하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좋았었습니다. 마냥 좋았죠. 아주 그냥 날아갈 듯 좋았습니다.



앞 'RPG 레드오션 투쟁기'에 썼듯이,


저는 한국 나이로 32살에 첫 직장을 그만두고 3년을 놀다가 (고시생으로 위장한 게임중독 폐인 백수로 살다가) 35살에 블랙기업이라 불릴 만한 건설회사에 재취업했었습니다. 연봉은 32살 시절에 비해 -25% 삭감되었고 직급은 대리였지만 회사 전체적으로 직급 인플레가 심해서 사원이나 다름없었으며 회사 일은 미친 듯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 회사에서 어찌어찌 성과를 올려서 입사 1년8개월 만에 과장으로 진급하긴 했었습니다. 연봉도 적절히 올라서 (여전히 첫 직장 주임 급 연봉보다 낮았지만) 얼추 재입사 초반보다 23% 가량 높아지긴 했었어요.


하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의 저에게는 '대기업 명함 한 장'이 절실했었습니다. 나름 첫 직장이 재계 20위 권에 드는 직장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고, 과장이 되어도 여전히 낮은 연봉에 대한 불만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 취업 시장에서 제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저를 대신해 구직 사이트를 찾아보던 와이프가 '이 회사 뭐야? CJ헬로비전? 법무팀 뽑는다는데?' 라는 말을 했고, 당시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재무제표를 찾아보고서 내가 숫자를 잘못 봤나 의심할 정도였죠.


2011년 기준으로 매출 5000억에 순이익 1500억.


그 숫자를 선뜻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건설업 기준으로 영업이익 5%만 되어도 잘 나간다는 얘기 들을 때였고 제가 재직하고 있던 회사는 순이익 0.1%로 버티던 상황이었는데, 저 너머 어딘가에는 순이익 30%를 자랑하는 초특급 알짜 산업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CJ헬로비전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저는 IPTV와 유선방송의 차이를 몰랐고 이건 거의 삼성전자에 지원하면서 갤럭시와 아이폰의 차이를 모른다는 것과 맞먹을 만큼 무식한 상태였지만 당당하게 'IPTV와 유선방송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기도 했었죠.


어어, 그런데... 합격했습니다. 유선방송업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티를 팍팍 냈는데도 채용이 되긴 했습니다.


대신 직급은 제대로 후려치기 당했죠. 37살 나이에 대리 1년차.


정상적인 프로이직러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맞습니다. 직급에서 최소 -4년 손해보는 것이고, 30대 후반에 이 정도로 내려먹게 되면 다시 만회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직급이 중요한 한국 취업시장에서 이렇게까지 내려먹으면서 대기업 가는 건 영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받아들였습니다. '재계 20위 안에 드는 대기업집단의 구성원이 된다. 다시 한 번.' 이라는 테마가 너무 강렬했거든요.


CJ헬로비전으로 이직하겠다는 얘길 다니던 회사에 하고 나서 술을 좀 먹은 날. 택시에서 울기도 했었습니다. 허송세월했던 3년의 시간을 이렇게 돌려받는구나 하는 순진한 생각에 술기운이 더해져 눈물을 흘렸었습니다.


그 때는 마냥 좋았습니다. 그 때는.



그리고 시간이 지나 2024년 11월. 현재 LG헬로비전이 회사와 관련하여 기사 하나가 났습니다.


`24년 3분기 기준 순이익 22억. 경영악화로 인해 희망퇴직까지 진행한다는 취지의 기사였습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17/0001037970?sid=105


2012년에 제가 본 제무제표 상으로는 매출 5000억에 순이익 1500억.

그리고 12년 후에는 연매출이 1조 훌쩍 넘었지만 순이익은 연간 100억도 안 될 것 같은 상황.


한 때 유선방송업 분야에서 매출 및 가입자 기준으로 1위였고, 소속 대기업집단의 덩치로 따져도 유선방송사업자 중 가장 컸으며, 연간 매출 대비 30%의 순이익을 남기고 현금보유액이 3000억을 훌쩍 넘어 알짜 중의 알짜기업으로 대우받았던 헬로비전. 그 회사는 12년 만에 순이익이 매출 대비 1% 미만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제가 12년 전에 CJ헬로비전으로 이직하려고 떠나왔던 건설회사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제가 헬로비전에 계속 남았다면... 이번에 희망퇴직 대상이 되었겠죠. 나이도 거의 50살 다 됐고 재직기간도 10년 넘었을 테니 희망퇴직 신청해서 나가라는 압박을 받았을 겁니다.


안 나가고 버틴다 해도 결국은 미래가 없었겠죠. 원래 LG그룹 출신도 아니고 인수한 회사에 묻어온 떨거지인 데다 직군도 언제든 대체 가능한 법무직군이고 나이도 많아졌으니 빨리 내보내고 싶은 직원 0순위에 올라갔을 겁니다.



12년. 개인의 삶에서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국가 전체와 각 산업 측면에서는 또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유선방송업은 다이내믹(Dynamic)하게 추락했고 또 그 산업에서 1위였던 헬로비전 또한 다이내믹하게 험난한 일을 겪었습니다. 지금 상황만 보면 LG그룹 입장에서 '이럴려고 헬로비전 샀나 자괴감이 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추락했습니다.


물론 회사가 내리막길을 간다고 해서 그 소속 구성원들이 모두 내리막길을 가는 건 아닙니다. 망해가는 회사에서도 임원이 나오고 대표이사 사장 승진이 이루어집니다. 헬로비전의 구성원 중 몇몇은 잘 됐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은 저처럼 떠났거나 / 그리 좋지 않은 미래를 맞이했을 겁니다. 제가 2016년에 떠나 온 후 8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상당수가 다른 회사로 갔을 거예요.



`90년대에 유행하던 노래가사가 생각나네요. [모두 떠나 버~린 후 텅 빈 객석을~ 보며]


입사한 지 12년 되었고 떠난 지 8년 된 회사. 당시에는 대한민국 내에서 손꼽을 만큼 돈을 잘 벌었고 곳간에 현금이 두둑했지만 지금은 바닥 아래 지하실을 헤매고 있는 회사. 텅 빈 객석처럼 되어버린 회사.


그 회사를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을 되새겨 보기로 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One by one. Course by course. 묻어 뒀던 기억들이 더 이상 흐릿해지기 전에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어디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미리 양해의 말씀을 좀 드리면,


이 글은 원래 2027년 정도부터 쓸 생각이었습니다. 헬로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당시 CJ그룹의 상황을 같이 언급할 수 밖에 없고, 그 언급 중 상당수는 CJ그룹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얘기가 될 테니까요. 재계 20위권 기업집단에 대해 안 좋은 글 쓰려면 이직하고 나서 10년 가량 기다리는 게 적절하긴 할 겁니다.


뭐, 이걸 2024년 말 ~ 2025년에 쓴다고 해도 딱히 명예훼손 등등의 문제는 없습니다. 제가 없는 얘기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실제 있었던 일에 적절히 공익목적을 더해 글 쓰는 건 아주 적법하죠. 일부 불편해 하시는 분들이 있든말든 아몰랑.


일단 써 보겠습니다. 유선방송 전체의 상황, 그 중 1위 업체였던 헬로비전의 전략, 그 전략이 나오게 된 CJ그룹의 (뜬금없는) 미래전략, 그 속에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직원들의 군상(群像) 등등. 잡다한 얘기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제목에 '헬로비전 잔혹사'라고 썼듯이, 아마 안 좋은 얘기가 더 많이 나오겠죠? 적절히 양해해 주시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글은 비정기적으로 연재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래 2~3년 더 지나면 쓸 글을 미리 쓰는 것이라서 저 자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연재 주기를 약속드릴 수 없는 점 또한 양해 부탁드립니다.


헬로비전 잔혹사. 지금 곧 시작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