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엔 도무지 방법이 없다.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자.
어느 날 당신은 이유 모를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다. 느닷없이 의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당신에게 말기 암 얘기를 꺼낸다. 동시에 현재 손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으며 살 수 있는 기간이 한 달밖에 안 남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시한부 선고를 한다.
또 당신은 추락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 탑승해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우리 비행기의 날개는 불길에 휩싸여 있으며 내부의 승객들은 남녀노소 모두 울고불고 난리가 난 아비규환의 상태이다. 이대로라면 비행기가 땅에 곤두박질치기까지는 어림잡아 약 1분 정도의 시간만이 남은 거 같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지도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까맣게 드리운 위 두 가지 상황에서 당신은 과연 누가 생각날까. 부모님의 원수? 나에게 사기를 쳐 전 재산을 갖고 달아난 가까웠던 친구, 지옥 같은 고통을 줬던 바람이 나서 떠난 옛 애인도 아니다. 늘 복수를 꿈꾸고 원망의 대상이었던 그 악인들은 별로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가족, 연인, 친구 등 사랑하고 고마웠던 사람들만이 머리를 스칠 것이라 감히 예상한다. 지난 시간 동안 나의 사랑 표현이 부족했음을 자책하고 그때 가서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야속해하며 뒤늦은 표현을 하려 애쓸 것이다. 딱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지금이라면 민망함을 앞세워 ‘굳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나중으로 미루겠지만 앞서 가정한 절체절명의 시간이 온다면 분명히 지체와 고민 없이 문자를 보낼 것이다.
“고마웠고 미안했어. 사랑해.”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또 그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삶이다. 증오와 분노로 삶을 보내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사랑을 많이 ‘받는’ 자보다 많이 ‘하는’ 자가 되라는 말이 있다.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기에 그자는 점점 신에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