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계획한다

계획을 계획하는 것을 계획한다

by 이영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에 샤워해야만 한다. 기상 후 샤워를 통해 잠을 깨며 오늘 하루의 계획을 다시 정립해본다.


가령 금일 3시에 업무 관련 미팅이 있다면 집을 나서는 시간, 이동 시 소요되는 시간, 미리 준비하고 다시 확인해 봐야 할 항목, 들고 갈 준비물, 약속 장소에 도착 전까지 할 수 있는 것, 무엇을 마시고 먹을지 등등. 심지어 중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변수도 예상해본다. ‘밖에 있는 도중에 땀이 너무 나면 어떡하지?’, ‘차가 막히는 건 괜찮은데 초행길이라 길을 못 찾으면 어떡하지?’처럼 날씨 문제, 교통 문제 등등. 이렇게 그날의 일정을 ‘진짜 진짜 마지막’ 체크를 하는 순간이다. 왜 ‘진짜 진짜 마지막’ 체크냐. 사실 전날 자기 전에 이미 충분히 생각했었던 내용들이다. 심지어 다음날 기상 후 샤워를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다시 곱씹어 볼 미래의 나까지도 염두에 두었다. 자기 전의 체크가 ‘진짜 마지막’ 체크였기 때문에 샤워 중 체크가 ‘진짜 진짜 마지막’ 체크가 된다.

더 솔직히 말하면 며칠 전 혹은 몇 주 전 오늘의 미팅을 정한 순간 다 생각했고 계획했던 사항들이다. 미팅 전날 잠자리에 들며 다시 헤아려 볼 나와 당일 아침 샤워를 하며 이 모든 것을 또 돌이켜 정리해 볼 나까지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진짜 마지막’ 체크와 ‘진짜 진짜 마지막’ 체크를 할 나의 모습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술 더 뜨자면 업무 미팅이 잡히기도 전에 오늘의 약속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앞서 말했던 모든 것들은 고려와 작정을 마쳤다. 즉 오늘 홍대의 약속 장소에 도착하는 이동 동선을 최소 4번은 생각해 봐야 안심이 된다. 진짜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체크가 최소 4번인 이유는 홍대는 이미 수년간 수십 번을 다녀 지리에 빠삭하고 집에서 30분도 안 걸리며 대중교통도 집 앞에 다니는 버스 한 번만 타면 갈아탈 필요조차 없는 익숙한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야 한다면 최소 5번 이상은…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아침에 샤워를 해야만 한다. 몇 주 전 세워놓았던 계획에 아침에 샤워를 하며 다시 모든 걸 되짚어보는 내 모습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계획의 저주를 받았고 이 불치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겸허히 받아들이고 공생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피곤한 삶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6화알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