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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Apr 16. 2024

카페의 두 얼굴

평범한 공간의 특별한 쓰임


5.


기자단 활동을 하다 보면 요청을 받아 취재를 가게 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우울에 불시착 F329> 전시도 그중 하나였다.


담당자님께 카톡으로 전시 안내를 받았는데 전시 장소가 의정부동에 위치한 '카페 두스트'라는 곳이었다. 지역 청년 문화기획자들이 카페를 대관해 전시를 여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전시를 한다고? 어떻게? 테이블은? 손님들은? 전시 공간이 확보가 되나?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사는 민락동에서 의정부동까지는 버스로 1시간. 의정부동은 의정부에 15년 넘게 살면서도 역 주변을 제외하고는 거의 가본 적이 없어 잘 몰랐다.


경전철을 타고 의정부시청역에 내려 지도 앱을 보며 카페를 찾아 나섰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빨간 벽돌집들이 늘어선 주택가였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멀리서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건물이 보였다. 저기구나.


카페는 주택 건물 1층에 위치해 출입문이 2개나 있었고, 전시 때문에 창문과 출입문을 가려둬 내부 모습을 가늠할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카페 내부는 초등학교 교실 2개를 붙여놓은 것 같이 커 보였고, 곳곳에는 네온사인을 연상케 하는 컬러풀한 오브제들이 놓여 있었다. 형광색의 조명들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신비로운 느낌을 뿜어냈고,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잔잔히 파도치는 소리와 우주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경음악이 끊임없이 나왔다.


"우울 행성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오래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고 금방 훌쩍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전시의 주제는 '우울', 테마는 '우울 행성'이었다. 전시장은 크게 여섯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각각의 부스에서 서로 다른 컨셉의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전시의 특별한 점은 '오감체험형' 전시라는 점인데, 오감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다는 건지 궁금증과 기대감을 안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체험이 있다. 첫 번째는 '감정공방'이다. 카페 한 구석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내 감정을 진단하고 채색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다 큰 어른이 크레용이라니,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앉아 그림을 그렸다.


크레용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익숙한지만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감각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크레용을 잡은 게 언제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물건들이 있구나.' 잡다한 생각을 하며 지금 이 느낌을 마음 가는 대로 그렸다.


테이블 주변 벽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있었다. 그 앞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며 이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두 번째 체험은 '행성제작소'다. '우울 행성'이라는 전시 컨셉에 맞는 센스 있는 작명이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클레이를 이용해 나만의 행성을 만들어 이름을 지었다.


와, 클레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만져봤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 원하는 색상의 클레이들을 앞에 놔두고, 스티로폼에 클레이를 붙이는 것에 열중하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걱정할 것 하나 없는 아이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이 외에도 편지 쓰기, 따뜻한 차 마시기, 소원나무 적기 등 다양한 체험이 있었다. 전시에서의 감각은 전시장을 나와서도 오래오래 기억으로 남았다.




전시가 끝나고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 세 명의 기획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외계인의 밤'이 진행됐다. 나는 취재를 위해 온 거라 풍부한 기사 내용을 수집하기 위해 남아서 참여했다. 이 시간에는 기획 의도와 전시 비하인드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전시에 담고 싶었던 의미는… ‘우울’이라는 감정 자체가 행복하고, 슬프고, 배고픈 보통의 감정들처럼 정말 보편적인 감정이거든요. 근데 우리는 너무 어릴 때부터 우울을 계속해서 배척해야 하고 차별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학습된 결과죠.

사람들이 “빠져나와야 된다, 이겨내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한테는 우울증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 자체가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어요. 사실 우울증이라는 건 이겨내는 게 아니라 마주 보는 거예요. 내가 거울을 보고 마주 보듯 그냥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나한테 질문을 하고 나 스스로 내 상태를 물어보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행복할 때는 “이것 때문에 행복해, 나 이거 하면 행복해” 하는데, 우울에 관해서는 질문조차 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기 차분하고 가라앉는 완전히 다른 공간을 하나 만들어서 여기에 우울이라는 키워드가 던져졌을 때, 사람들이 본인도 몰랐을 그런 우울에 불시착했을 때, 감정을 돌아보고 우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획을 하게 되었어요.
‘보다’와 ‘응시하다’는 말이 다르거든요. ‘보다’는 그냥 보여서 보는 거지만 ‘응시하다’는 내가 그것을 보고 싶어서, “봐야겠다” 해서 의식해서 보는 행위예요. 의식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먹어보는 것들. 이렇게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서 감각을 내가 직접 느끼는 거예요. [...] 다양한 오감을 통해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소리, 냄새, 맛과 같은 자극들에 나의 주의를 보내 전환시켜 보는 것에 의도가 있었어요.


이런 메이커와의 만남의 자리는 단순 전시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로 전시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이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이 주목하는 어젠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집요한 탐구의 흔적과 전환적 시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우울행성에 불시착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당신이 우울에 불시착했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었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글, 그림, 음악, 물건, 사진 등을 자유롭게 준비해 오시면 됩니다."


전시회 하루 전에 받은 '외계인의 밤' 안내 문자다. 기획자들의 말이 끝나고, 참여자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 무거워 보일 수 있는 주제임에도 현장 분위기가 부드러워서 어렵지 않게 자기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시가 끝나고 카페를 나오자 어둑한 밤이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전시장에서 겪었던 다채로운 감정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의정부에서도 이렇게 젊고 힙한 전시를 할 수 있다니. 그것도 감정을, 우울을 소재로 이렇게 흥미로운 전시를 열다니! 홍대, 성수 같은 핫플에서 하는 것처럼 지역에도 청년들이 개최하는 전시들이 많아진다면, 도시가 얼마나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바뀔까?




나는 이날 카페의 두 얼굴을 봤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곳이자 주민들이 문화를 매개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교량이 되어주는 곳. 이 전시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평범한 공간이 특별한 쓰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지역과 활발히 소통하는 의정부 카페들을 하나둘 알아가기 시작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 주민들이 서로 마주하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꼭 거창한 이름이나 건물이나 자본이 필요한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공간, '카페'로도 충분하다.

<보여줄게 로컬에서 사는 법>은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에세이입니다.
● 원본 인터뷰 읽기 → https://blog.naver.com/ccity_ujb/222839929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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