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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Sep 21. 2023

5-1. E 팀장_최고 권력자이자 폭군 납시오

1:1 업무방식에 익숙해지다

해외파견이 결정되고, 나는 좀 들떠 있었다. 누구와 같이 근무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못 한 채.


전입하자마자, 순박한 눈망울을 가진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땡땡씨, E 팀장을 조심해요.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진짜 조심해요.”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까지 밖에 말해 줄 수 없던 선배가 고마우면서도, 안타깝고 속상하다. 그녀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에. 

 

그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젊다?”였다. 지금까지 내가 모셨던 상사들은 대부분 아버지 또래였고, 중후한 체격과 후덕한 뱃살 인심, 둥그런 얼굴에서 여유가 느껴졌었다. 

하지만 E 팀장은 치켜 올라간 눈, 나이대에 비해 큰 키와 마른 체격으로 웬만한 차장들보다 젊어 보였다. 의외로 말투는 살짝 촉새 같아 가벼워 보였고, 한쪽 다리를 덜덜 떠는 등 겉모습만 보아서는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회의 방식도 의아했다. 대부분, 팀장과 차장들의 회의 후, 차장이 담당 직원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세부내용을 확인하여 팀장에게 보고하는 형태였는데 E 팀장은 팀 내에서 “상사는 팀장 하나이고 나머지(차장, 직원)는 모두 팀원이다”라며 직원들도 최종보고를 차장이 아닌 팀장에게 직접 하기를 종용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본인 밑으로는 계급이 같다고 공표한 셈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차장에게 결재받은 서류가 팀장에게는 반려될 수 있었다. 

그럼 그 사유를 차장에게 전달하고, 지시를 받고 수정을 한 뒤, 다시 차장을 거쳐 팀장에게 최종보고했다. 시간은 배로 걸렸고, 주로 차장에게 보고했던 내가 차장의 상위 상사인 팀장에게 보고하려 하니 우물쭈물 걱정이 되었다. 매번 긴장하며 보고를 했다. 


하지만 팀장이 차장의 업무 방향을 탐탁지 않아 하면 사달이 났다. 차장의 지시사항을 따라 업무처리를 하였는데, 최종 결재권자인 팀장이 반려를 하니 직원인 나만 입장이 곤란했다. 더구나 E 팀장은 차장들 각자에게 조속히 해결해야 하는 현안들을 끊임없이 지시해서 차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바빴고, 타 팀과의 회의도 자주 있었다. 

몇 번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니, 차장에게 중간보고가 생략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차장도 개의치 않아 했다. 


결과적으로, 팀원 모두가 E 팀장과의 1:1 업무방식에 익숙해졌다. 

언뜻 보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E 팀장이 왜 저 방식을 고집했을까. 그는 팀 내에 이뤄지는 모든 자잘한 업무들을 파악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본인 모르게 진행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모든 일이 자기 손안에 잡혀야 했고, 그렇게 얻은 정보들은 그에게 권력이 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E 팀장은 업무에 꽤 꼼꼼한 괜찮은 상사처럼 보였는데, 일장일단이 있었다.

 

하루는 E 팀장이 처장회의에서 본인이 보고받지 못했던 사항으로 질책을 당하고 왔다. 중요한 회의에서, 본인이 모르는 일이 본인이 이끄는 팀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자, E 팀장을 위한 업무일지 회의가 팀 내에서 자체 시행되었다. 

우리 팀만의 업무일지표였는데,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 한 달 후에 할 일, 분기에 할 일, 반기에 할 일을 각각 적어 A4 한 장으로 취합하여 전 팀원이 탁자에 앉아 회의하는 거다. 한 장으로 취합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본 회의도 한 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회의의 요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팀원 “패기”였다. 그러니까 한 사람씩 본인의 업무계획을 모두가 듣는 앞에서 팀장에게 발표하는데, E 팀장은 중간에 첨언을 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담당자를 호되게 다그쳤다. 그게 F 차장이기도, G 차장이기도 했고 물론 나였던 적도 많다. 

예외는 없었다. 대놓고 “팀원 돌려 까기”였던 셈인데 묵직한 직구로 전력을 다해서 던졌다. 그러면 팀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를 내세우면 더 혼쭐이 났고, 나중에는 모두들 묵언수행을 하는 것처럼 적막만 흘렀다. 정당한 사유는 핑계에 불과했고, 어차피 통하지 않았다. 


그는 구실을 찾을 뿐이고, 찾으려 하면 사람마다 티끌은 있으니까.  

 

공동의 적이 있으니 사실 팀원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고참 차장들의 귀가 빨갛게 되기도 했고, 듣고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하도 혼이 나니 다들 그러려니 했다. 오늘은 저 사람 차례구나, E 팀장의 기분이 왜 저렇게 저조하지, 심기가 불편하구나 망했다 정도.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다음 차례인 내가, 제발 조금만 당하고 넘어가길 기도할 뿐이었다. 

그런데 또 특이하게도, 꼭 그는 한 명은 치켜세우고 한 명은 주저앉혔다. 팀원들 사이에 경쟁심리를 부추기나 싶었는데, 팀원들에겐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E 팀장은 일관성이 있지는 않아서, 어제 잘했다고 해서 오늘도 잘했다고 칭찬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뭔가 본인이 보았을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의정이 한순간에 역적이 되어 숙청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 임금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하급 인생처럼, 나는 서서히 적응해 나갔고, 길들여져 갔다. 


그는 이 팀의 최고 권력자이자, 폭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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