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만한 자존심
전입하자마자, 전임자에게 인계받은 대로 E 팀장에게 보고를 하니, 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디에 근거하여 이 금액이 산출되었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거냐고. 지침을 가지고 오라고 하더니 하나하나 분석했다. 토시 하나에도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면서. 전임자에게 확인해 보니 이렇게까지 세세히 물어보질 않았다고 한다. 본인은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쯤 되니, 그에게 보고하러 가기 위해 나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혼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나는 정말이지 혼나고 싶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숙이고 왕에게 처분을 바라기보다는, 종이에 점이라도 찍어 놓고 싶었다. 혼나더라도, 내가 노력은 했다고 자기만족으로 나마 당당하고 싶었다. 정말 해도 안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 업무와 관련된 회사 내 각종 관리 규정, 사규(회사 내 규칙), 지침은 다 출력하여 형광펜으로 밑줄 치며 읽어보았고 그에게 보고하러 갈 때마다 지참했다. 다른 지사의 업무처리 내역도 살펴보았고, 과거 전임자들의 업무내용도 복기해서 비교해 보았다.
E 팀장이 의구심을 보이면, 근거되는 지침으로 “부드럽게” 반격했고, 조금이나마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보완하여 다음 보고 시에 첨언했다. “내가 E 팀장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업무를 진행했고, 보고 시 멘트도 준비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을 대뇌이고 보고에 들어갔다.
보고 타이밍도 중요했다. 이른 오전은 급 회의나 어제의 숙취로 인해 그가 예민해져 있었고, 점심 즈음에는 갑작스러운 처장과의 식사나 외부 손님 방문 등으로 곤란했다.
안전한 시간은 대략 10시에서 11시 사이였고, 그마저도 다른 차장과 직원의 보고 내용을 엿들으며 그의 기분을 파악했다. 이전 사람의 보고가 비교적 완만하게 진행되었다면, 눈치껏 그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렇게 업무적으로만 굴려졌으면 E 팀장에게 고마워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나에게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우리 회사에서 그가 줄기차게 말하는 “누구랑 일했는지 물어보는 것 = 어떻게 배웠는지 아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참 많이 무서웠다. 그 고립된 분위기 속에 모두가 돌아가며 혼나는 상황. 내 차례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혼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고, 질책을 “잘”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까 업무로서 평가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E 팀장이 화를 낼 때마다 “직장인 나”가 아닌 “나 자신”이 위축되어 갔다.
대부분의 남자 직원들은 군대를 경험했고, 군대 속에서 이뤄지는 상명하복에 익숙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를 포함한 여직원 대다수는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니까, 질책에 오히려 “발끈” 하거나 “삐짐”으로 표현이 되는데, 상급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소리 없는 반항으로 보인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거다. 그리고 E 팀장에게는 아무 이유 없는 꾸중에도 "잘못했다"라고 시인해야 했다. 그래야 그의 호통이 끝났다. 그러니 나는, 그 단계까지 가려면 그만큼 더 밟히고 많이 울어야 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거다. 분명 뭔가 심사가 비틀렸을 텐데,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거다.
처음 나에게 조언을 해 주었던 여자 선배는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팀원들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B 차장은 아빠 연배라 그런지 믿는 구석이라 울었는지는 몰라도, E 팀장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다. 나의 오만한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운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다 가도 조각조각 희미해서 진짜 있었던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에게 일찍 흰 깃발을 흔들었다면, 조금은 편하게 생활했을까. 밟아도 죽은 듯 있어야 흥미를 잃을 텐데 밟는 족족 꿈틀거렸으니 오히려 나를 괴롭혀 달라고 애원한 셈이다.
우습게도, E 팀장은 대외적으로 평판이 좋았다. 높은 상사는 물론이고 직원들에게도 웃으며 대했고, 젊어 보이는 실루엣과 가벼워 보이는 목소리도 한몫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 팀에서 “본인”만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본인이 집중받아야 했고, 스포트라이트는 그의 것이어야 했다. 어떤 차장의 성과도 본인이 팀을 잘 이끈 결과여야 했고, 누구도 그보다 빛나서는 안되었다.
다른 팀에서 전화가 오면, 최대한 작게, 사무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고, 통화가 길어지면 식은땀이 나곤 했다. 대부분이 전화로 문의가 오면 최소한 한 친절하게 대하려 하는데, 그는 잘 보이려 하는 의도가 수상하다며 그 팀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의 뇌 속이 궁금해졌다. 친절하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본인의 자리가 불안한 건지 팀원들을 구속하고 싶은 건지.
나 역시 전입 초기에 E 팀장이 인기관리하냐며 비아냥거렸고, 이쯤 되니, 나는 업무 관련으로 오는 전화에도 사무적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사내 메신저 문의가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메신저 상으로 “보통” 친절하게 대하는 건, 그도 알 수가 없으니까.
E 팀장은 그렇게 철저하게 사무실 내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사무실은 타자 치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무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