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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Sep 23. 2023

5-3. E 팀장_시작은 사소하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E 팀장의 책상 옆에는 의자가 하나 있는데, 누가 앉아서 보고를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졌을 때였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업무와 관련 없는 사소한 일상 이야기로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의 기분을 세심히 살펴 보고를 하는데, 맥락 없이 보고 중간에 그가 툭 다른 주제를 던지는 거다. 그럼 나는 가볍게 받아넘기고,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사설이 점점 길어지더니 주객이 전도되었다. 보고 내용보다 지극히 가벼운 잡담이 주가 되었는데, 결재는 받아야 했고 그의 시답잖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척했다. 

그러다가 일이 일어났다. 


지나가는 말처럼 너는 손톱을 안 하니, 어느 팀의 여직원은 귀걸이를 주렁주렁했더라.

그런데 손톱 이야기를 할 때는 나의 손을, 귀걸이 이야기를 할 때는 내 귀를 만졌다. 너무나 가벼운 터치였지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식자리가 아닌 사무실 안이었고, 심지어 보고 중이었다. 보고가 끝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돌아갔다. 

다른 사람이 보고 할 때 팀장 자리를 유심히 보니,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나의 불편함을 알아채기는 힘들었다. 다른 팀 여직원과도 사이가 좋았던 그였기에, 가끔 그들의 대화를 관찰했는데, 살짝 터치가 있는 거 같았다. 습관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희망 사항이었다. 


나는 도움을 요청할 수도, 보고를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갇혀버렸다. 

왜냐하면, 우선 누구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의 폭군이었고, 다른 팀이나, 더 위의 상사인 처장이 나를 옹호해 줄 거란 기대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알았어도 덮으려 노력했을 것이고.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제 살 깎아먹기 바빴다. 각자의 전장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누가 나를 도와준다는 말인가. 모두가 힘들었다. 숨죽여 일하고, 책 잡히지 않으려,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곳에서 나는 발버둥 쳐 보았자 진흙탕 속으로 더 빠질 것 같았다.


차장들의 컴퓨터 바탕화면 배경은 주로 가족사진이었는데, 도움을 청할 차장 얼굴을 떠올리다 가도 그들의 가족이 생각났다. 그래, 그들은 다 딸린 식구가 있으니까 내 일에 나서긴 힘들지. 

그리고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차장들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외면했을 뿐.

 

그리고 둘째, 업무적으로도 나는 보고를 해야 했다. 나의 업무는, 주로 직원들의 “돈”과 관련되었는데, E 팀장의 수기 결재를 받아야 했고, 전산상으로도 E 팀장의 결재가 완료되어야 돈이 지급되는 시스템이었다. E 팀장의 기분에 따라 직원이 돈을 내일 받을 수도, 며칠이 걸릴 수도 있었다. 

“한쪽 팔은 그에게 넘겨준다"라는 각오로 보고에 들어갔고, 내 몸뿐만 아니라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려 결재를 득할 수 있었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서류를 가져가면, 다시 찾으러 오라며 2라운드를 예고했기에 한 번에 결재할 만한 양을, 그리고 결재 순서도 정해서 보고했다. 


사람이 어찌나 그렇게 치졸하고 얄팍한지, 그는 본인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의 결재는 잘하지 않았다. 

한 번은 수기 결재를 끝낸 서류의 전산상 결재가 완료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5명 중 다른 팀의 팀장 건 하나는 끝끝내 결재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 팀장이 직접 우리 팀으로 찾아왔고, E 팀장에게 직접 부탁을 하고서야 결재가 났다. 

E 팀장은 특유의 대외적인 미소를 띠며 “이 간단한 걸 뭐 하러 찾아오셨어요~ 전화로 하시지. 바로 결재했습니다” 하며 털털하게 내숭을 피웠고, 나는 그의 얕은수를 보며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게 그는 당신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의 향기에 취해 있었다. 



한 번이라도 팀장님, 불쾌합니다.라고 왜 말을 못 했을까. 말은커녕 불편한 기색조차 내지 못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한 척하더니, 그의 앞에서 나는 주눅 들어 있었고, 권력에 압도당한 지 오래였다. 

우리 팀의, 사무실의 독재자인 그 앞에, 나는 무력해져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하루하루 속은 문드러져갔다. 

나의 반응을 관찰하기라도 한 듯이, 내가 결재를 받을 때마다 그의 터치는 더 과감 해졌다. 내 손을 잡고 있기도 했고, 왜 이리 말랐냐며 한쪽 팔을 주물럭 거리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나는 점점 메말라 갔고, 저항하기는커녕 일찌감치 상황에 포기했다. 용기도, 의지도 시든 지 오래였으니까.


그래,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걸 포기했다. 가족에게 조차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렇게 두서없이 적는 글로도 A4 8장이 나왔다. 

E 팀장에 대한 사전 설명과 그의 팀 내 위치, 분위기, 팀원들의 반응, 내가 보는 시선, 그 공기마저 무거운 사무실. 구구절절 이야기할 힘도 없었다. 


딱 한 번, 전화로 삼촌에게 슬며시 말해 본 적이 있다. 성희롱 비슷하게 하는 상사가 있다고. 그때 삼촌은, 사건의 심각성을 모르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우리 학교 나온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없는데.”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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