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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Sep 19. 2023

4-1. D 과장_해바라기의 여러 얼굴

해바라기에게 찍힌 발등

D 과장은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색으로 치면 연한 노랑이 떠오르고, 단어로 표현하자면 무해하고 다정한. 

그러니까 굳이 꼬집어 말하자면, 분명 호감형 얼굴은 아니었는데도 그의 미소는 그를 해사하게 보이게 했다. 유한 태도와 여유 있는 모습에서 사회적 연륜이 느껴졌고 내 고민을 이야기하면 자상하게 듣고 위로해 줄 법했다. 

D 과장은, C 과장의 믹스커피 동료 중 하나였고 다른 직원들과는 다르게 부담스럽지 않게 내게 다가왔다. 오히려 처음에는 조심스러워서, 신입사원인 나를 배려해 주는구나 싶었다. 처음 전입하자마자 살얼음 판 걷는 것 마냥 긴장하게 했던 B 차장과 업무로 실망스러웠던 C 과장을 만났기 때문에, D 과장은 해바라기처럼 보였다. 

그래, 세상은 공평한 거다.

 

D 과장과는 이렇다 할 에피소드가 없었는데, 업무적으로 연관이 되지 않았고 사무실도 달라 오며 가며 소소하게 인사만 했다. 그리고 내가 B 차장을 따라 타 부서로 이동하며 사무실을 옮겼는데, 그 사무실이 D 과장 자리와 지척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업무용 얼굴이 따로 있었다. 사적으로는 참 다정했으나, 본인에게 넘어올 것 같은 업무에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와 같은 부서의 남자 후배에게 특히 선을 분명하게 했는데, 남자 후배는 종종 툴툴거리며 D 과장 흉을 보았다. 분명 D 과장이 아는 업무이고 도와줄 법한데 발을 뺀다고. 

사실, D 과장이 남자 후배의 업무를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는 없었지만 듣다 보면 야박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 역시 업무적으로 D 과장과 엮인 적이 있었는데, 테두리만 겉으로 훑더니 어느새 나와 박 과장의 일이 되어 있었다. 중요한 순간, D 과장은 사라져 있었는데, 타격이 크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어차피 해야 하는 감사업무였다. 대강 방향을 설정해 준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대부분은 평화롭게 지냈다. 


한 번씩 믹스커피를 같이 마셨고, 어디서 듣지 못할 지사 직원들 관련 소식, B 차장을 찌르고 싶다던 여직원의 스토리 등등 그들의 뒷이야기를 D 과장에게 들었다. 딱히 즐거움이 없던 시기였고, 그와의 대화는 잠시나마 쏠쏠히 시간 때우기 적합했다.


신기하게도, D 과장은 남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홍홍홍~ " 하고 수줍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어서 그런가. 뭔가 수줍은 새색시 느낌도 났다. 나이차도 꽤 나는 고참 과장인데도, 여직원들과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니까 “여직원들” 하고만 잘 지냈다. 

같이 일하는 남자 후배와, 동년배 언저리의 남자 직원, 남자 상사들에게는 묘하게 거리가 있었는데, 가끔씩 군대 이야기를 하면 아, 이분도 남자였지 했다. 수다를 떨다 보면 나이 많은 언니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간혹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누나가 한둘이 있고, 딸도 있어서 여자와의 대화가 물 흐르는 듯한. 심지어 그는 딸 바보였다.    

 


딱히 사건이다 할 것도 없었지만, 대부분의 일은 회식자리에서 생긴다. 몇몇 부서의 합동 회식이었고, 당연히 술이 오갔으며 다들 얼큰하게 취했다. 

그 당시 나는 C 과장의 “지사장 옆자리 선정” 사건으로 마음이 뒤틀려 지사장 참석 회식이 아니면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돌하게도 나랑 술을 마시려면 알아서 내 옆자리에 와라였는데, 정말 기가 찬 나 혼자만의 반항인 셈이다. 그것도 C 과장이 시험준비로 바쁜 틈에. 


나도 참 기회주의자고, 또 겉으로 티 나고 싶지는 않은 이도 저도 안 되는 소인배였다.


술을 마시려는 목적인 직원들이 밀물과 썰물 마냥 부지런히 옮겨 다녔고, D 과장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심 편하게 생각했던 D 과장이 반가웠고, 기억에 남지도 않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D 과장이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나의 허벅지를 손으로 만진 것이다. 


원체 여성적이기도 했고, 평소에 이야기할 때도 격한 반응으로 어깨를 두드리거나 툭툭 건드리기 일 수였는데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허벅지는 좀 달랐다. 고의가 아닌 이상 허벅지를? 나는 내가 오해했겠지 거니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슬며시 허벅지를 옮겨보았다. 

제발. 

아니나 다를까. 그의 허벅지가 자연스레 따라왔고, 다시 그의 손이 내 허벅지를 만졌다. 


이 지사는 다들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가? 그게 아니면 내가 뭔가 행동을 잘 못 한 걸까. 내가 여지를 남겼나? 아니면 너무 친밀해서 하는 행동일까.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는 편을 택했고, 노래방 가는 길에 회식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무렵, D 과장에게서 카톡을 받았다. 어디 갔냐고, 다들 찾는다고. 



나는 몸이 피곤하다고 답장을 했고, 그다음 날 해사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마주 보고 미소 지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해바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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