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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sol Sep 06. 2024

메밀국수 한 그릇에 가득 담긴 건강과 행운

소바(蕎麦)와 일본의 생활문화 이야기 - 도시코시 소바 「年越しそば」

 연일 30도가 넘는 폭염에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더위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다. 더위에 지친 심신을 보양하기 위해 삼계탕이나 시원한 냉면을 먹는 것은 여름철 식문화의 의식(儀式)에 가까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 전, 더위에 달구어진 몸을 차갑게 해 준다는 시원하고 담백한 메밀국수를 먹으면서 난생처음 메밀국수를 먹게 되었던, 그야말로 의식(儀式)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신선한 문화충격의 추억이 생각났다.

 오래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어느 정도 일본 생활이 적응이 될 때쯤, 학교와 집을 오가며 단순한 학생으로서의 밋밋한 생활을 지내던 중, ‘일본의, 일본다운, 일본 스러운’ 일본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 문화를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겨울방학을 맞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유학생들은 부모형제가 있는 고국으로 간다며 비행기 항공권을 구입하고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은 무엇이 좋을지, 서로 즐겁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보며 그저 부러워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었다.

 그때, 항상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 준 나까지마 미에꼬(中島美恵子)라는 친구가 연말연시에 자기네 집으로 오지 않겠냐고 초대를 했다. 미에꼬의 엄마가 한국의 초대형 울트라급 가수 조용필 님의 광팬이라고 하면서 한국에 대해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다며 한국 유학생인 나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너무 좋아서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로 설레었다.

 미에꼬의 고향은 나가노현(長野県)에 있는 가루이자와(軽井沢)라는 곳이다. 산과 호수 등 자연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곳으로 일본 황실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지리적 환경으로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로 도쿄를 중심으로 보면 북서쪽에 위치하여 여름에는 선선한 날씨가 지속되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등 천혜의 기후라는 지역자원을 갖고 있어서 골프장과 스키장 등 스포츠 휴양 시설이 많은 곳이다. 

 약속한 날에 가루이자와 역에 도착하니 털실로 뜬 노란색 방울 모자를 쓴 미에꼬가 여동생과 함께 양손을 마구마구 흔들며 내 이름을 부르며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창피할 정도로 유난스레 나를 반겨주었다. 역에서 나오니 마침 나가노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나가노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서명을 받는 데스크가 있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일본의 연말연시 문화체험의 기회를 준 친절한 친구를 위해 기꺼이 서명을 했다.

‘나가노 동계 올림픽! 꼭 유치하시길 바랍니다! ’

 미에꼬의 부모님은 선조의 대를 이어서 사카야(酒屋)를 운영하셨다. 사카야는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고 술을 제조하여 술만 판매하는 업종으로 술의 제조법을 선대로부터 이어받아 후대에도 전승하여 그 고유한 비법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업으로 여긴다고 한다. 선조의 업에 대하여 설명하는 미에꼬의 얼굴 표정은 자긍심으로 넘쳐 사뭇 비장한 모습으로 보였다. 

 저녁 무렵, 집에 도착하니 미에꼬네 할머니와 부모님, 이모, 고모, 삼촌과 숙모, 사카야에서 일하는 직원 등 가족 모두가 환하고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셨다. 연말연시를 한국인 유학생과 같이 보내기 위해 모처럼 대가족이 모였다고 했다. 미에꼬와의 혈연관계와 이름을 말하며 자기소개들을 했지만 외우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석자(세 글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 사람들의 이름은 읽기도 어렵고 길어서 외우기가 어려웠다.

 거실 한가운데는 이미 대형 식탁이 차려져 있었고 나를 TV가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두툼한 방석과 함께 안내해 주셨다. 

 배가 고팠던 참에 ‘이것 좀 먹어봐요. 이것도’하면서 어머님이 권해 주시는 대로 젓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입으로 음식물을 넣었다. 꼭꼭 씹어 먹으라며 그 음식의 이름과 식재료, 양념은 어떻게 했으며 어떤 영양가가 있는지 설명해 주셨지만 그것 역시 너무 많은 종류를 정신없이 먹었기에 외울 수가 없었다. 

 배가 불러서 숨도 못 쉴 정도가 된 밤 11시쯤, 가족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다시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식탁 위에 또다시 다른 음식이 담긴 그릇이 한 사람당 한 개씩 놓였다. 빨간색 매듭 실로 만든 리본이 달린 젓가락 포장지도 그릇 옆에 놓였다.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먹어야 한단다.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다들 무슨 의식이라도 행사하는 듯 국수를 먹고 있었다. 

배가 불러서 이걸 먹어야 하나~ 하고 국수 그릇을 쳐다보고 있는데 미에꼬가 말했다.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라는 국수야. 얼른 먹어. 이걸 새해가 오기 전에 먹어야 올 한 해의 나쁜 일도 없어지고 새해에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어!’

구래~! 그렇다면 배가 터져도 먹어야지!

 소바, 즉 메밀로 만든 국수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는 일본인의 오래전부터 내려온 일본 고유의 생활풍습으로 한 해를 넘기는 12월 말일인 「年越し(도시코시)」 또는 「大晦日(오오미소카)[1]」에 먹는 메밀국수이다. 한 해 동안 사용했던 집안의 물건, 공간의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끝내면 가족 모두 모여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다.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가 정착하게 된 유래 설에는 우선 에도시대설(江戸時代說:1603년~1868년)로, 1756년 간행된 「眉斧日録(びふにちろく)」와 1814년에 간행된 「大坂繁花風土記」라는 서책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알려진 것으로, 에도시대 중기에 상업이 발달한 도시 오사카(大阪)의 상가(商家) 주인이 바쁜 월말이 되면 그동안 장사를 도와준 일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대신하여 「三十日そば(미소카 소바)」를 대접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반으로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는 에도시대(江戸時代)부터 시작되어 정착한 일본의 생활풍습이라고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후, 소바(메밀)의 원료인 소바 열매가 영양적 가치가 높아서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각기병을 완화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과 경사스러운 날에 먹는 음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三十日そば(미소카 소바)」의 풍습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의 유래설에는 가마쿠라시대설(鎌倉時代説)로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85년~13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후쿠오카시(福岡市)의 하카타역(博多駅) 앞에 있는 승천사(承天寺)라고 하는 절의 승려들이 흉년으로 농작물 생산을 망쳐 즐겁게 새해를 맞이하기 힘겨운 서민들에게 메밀 열매를 빻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대접하여 새해를 맞이할 기운을 얻게 한 기록을 토대로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설이다. 승려들이 베푼 메밀떡은 좋은 운(運)을 불러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에도시대 중기부터 면(麵)의 형태로 진화된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라는 명확한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대 (明治時代:1868년 ~ 1890년) 이후라고 한다 [2].  

매년 12월 31일인 「年越し(도시코시)」 그리고 「大晦日(오오미소카)」에 「年越しそば(도시코시 소바)」를 먹는 의미 또한 재미있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중요성과 우선순위에 관계없이 기술하겠다.

 첫째, 새해를 맞이하기 전날, 즉 12월 31일이 지나기 전에 먹어야 하는 이유로, 액막이 효과이다. 메밀국수는 쌀 국수와 밀가루 국수와는 달리 쫄깃쫄깃한 점성이 비교적 덜한 편이라 먹는 도중에 끊어지기 쉽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난 한 해에 있었던 기분 나뿐 일이나 고통스러웠던 일, 사건 사고 등의 기억을 잘라 내버리고 나빴던 일과 인연을 끊고 새로운 한 해까지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로 「절연 소바(縁切りそば)」라는 별칭도 있다.

 둘째, 가늘고 긴 면발처럼 오래 살 수 있도록 기원한다는 장수기원(長寿祈願)의 의미.

 셋째, 메밀의 원료인 메밀의 열매가 악천후 속에서 심한 비바람을 받아도 다음 날 맑게 개어 햇빛만 비치면 바로 멀쩡해지기 때문에 건강(健康)과 재수(財數)라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

 넷째, 옛날 금세공 장인들은 메밀가루를 둥글게 떡 형태로 만들어서 작업했던 자리에 떨어져 남아있는 금가루와 은가루를 묻혀가며 정리 정돈과 청소를 했다고 한다. 금가루와 은가루가 붙은 메밀떡은 다시 물에 넣어 녹여내면 떡은 풀어져 사라지고 금가루 은가루만을 다시 모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 금박을 얇게 늘릴 때에도 메밀가루를 사용하는 점에서 메밀은 금을 모으는 재수 좋은 곡식으로 금운상승(金運上昇)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섯째, 오래전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후쿠오카시(福岡市)의 하카타역(博多駅) 앞에 있는 승천사(承天寺)에서 빈곤한 사람들이 무사히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메밀떡인 「世直しそば(요나오시소바:세상을 구한 소바라는 의미)」의 기록에 따라 요나오시 소바를 먹은 사람들은 다음 해부터는 좋은 운이 들어왔다고 운기상승(運気上昇)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3].

 앞에서 서술한 에도시대 유래설에서 소개한 에도시대의 상인들이 월말에 먹었다던 미소카 소바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 생활문화에 확고하게 정착하게 한 사례가 있다. 

 일본 면업 단체 연합회(日本麺業団体連合会)는 매월 말일을 「そばの日(소바의 날)」로 제정했다 [4]. 상업 번성을 기원하는 일본 면업계의 마케팅 활성화를 꾀한 것이기도 하겠다. 이제 일본 사람들은 나쁜 일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끊어내기 위해 연말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매월 다가오는 월말에  「三十日そば(미소카 소바)」를 먹으면서 액막이 효과를 기대하며 새로 시작하는 다음 달의 첫날에 행운과 건강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건강기원과 금전운, 액막이 효과 등 메밀국수 한 그릇에 훌륭한 의미를 부여하며 소중하게 지켜온 일본 사람들의 생활관습에 나 역시 도시코시 소바를 후루룩 입에 집어넣고 힘겨웠던 유학 생활의 기억을 이빨로 끊어내면서 새해의 소원을 빌었던 미에꼬네 집에서의 추억이 새삼 새롭게 가슴속에서 시원하게 퍼졌다.



[1] 「年越し」「大晦日」두 단어 모두 12월 말일을 의미한다.

[2] 참조 : セゾンのくらし大研究 https://life.saisoncard.co.jp/family/post/c1138/

[3] 참조 : Hotel Ryumeikan의 홍보 사이트 https://www.ryumeikan-tokyo.jp/blog_toshikoshisoba/

[4] 참조:일본면업단체연합회(日本麺業団体連合会) 홈페이지 https://zenmenren.or.jp/raw_noodle_iroiro/japanese_so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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