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여왕으로 거듭나다.
큰딸은 자신의 딸 수진이의 유학생활 뒷바라지에 거의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 호주 멜버른의 땅을 밟았을 때의 의기탱천했던 기세는 자신의 능력 없음을 처절하게 깨달으며 바람 빠진 풍선마냥 점점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좁은 우물 안에서 여왕 같이 행세했던 헛뻥쟁이 미정이의 허세는 다른 세계, 넓은 세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싼 세계에서 결국은 우물 안의 개구리, 아니 올챙이 신세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영어로 말을 할 수 있기는커녕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명문대 출신의 학부모와 대기업 임원인 남편을 자랑해 대는 딸 수진이의 친구 엄마들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으로 자신의 초라함에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3년 이상 꼬박꼬박 세금을 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한국인 법무사라는 지인의 꼬드김에 상담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돈만 뜯기고 6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며 어떤 날은 한밤중에 질질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미정이는 술만 마시면 딸 수진이의 유학생활에 모든 희망을 걸었으며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희생했다며 ‘수진이 너 때문에 내 인생을 허비했다’고 딸 앞에서 히스테릭하게 울부짖는 몹쓸 짓을 해댔다고 한다.
부동산 사기행각으로 지인들에게 쫓겨 도망치듯 호주로 떠난 미정이는 자신도 호주에서 눈뜨고 있는데 코 베어갔다며 법무사 사기꾼에게 욕을 해대며 자신의 6년 또한 사기당했다고 투덜거렸다.
결국, 바보 같은 외국생활을 청산해야겠다고 또 한밤중에 춘자에게 전화를 걸어와서는 전화통 수화기 뚜껑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푹푹 한숨만 토해냈다.
멜버른에서 주택을 구매하거나 자영업을 하게 되면 영주권 신청에 유리하다는 현지 한국인 법무사의 말만 믿고 한국에서 미용실을 정리하며 가지고 간 돈을 몽땅 주택구입에 썼으며, 추어탕 식당을 폐업하고 실의에 빠져있던 동생 미영이 가족들을 멜버른으로 끌어들여 생명줄 같은 식당 보증금을 끓는 추어탕 가마솥에 털어 넣듯 개업한 미용실도 헐값에 처분했단다.
어렸을 때부터 무슨 질문에도 3초 이상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거나 중요한 일임에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이 없는 큰딸 미정이는 춘자의 예상대로 일사천리로 집과 미용실을 푼돈에 넘겼다.
미정이는 딸 수진이를 시드니에 있는 전문대학에 입학시키고 이제는 제 할 일 다 했다며 훌훌 털어버리듯이 수진이를 독립시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법 돈푼께나 벌었던 미용실을 호주로 가기 전에 처분했으니 한국으로 돌아와서 당장 할 일이 없던 미정이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호주에서의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게 지쳤는지 며칠 동안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잠만 잤다. 기운도 기세도 많이 빠졌으리라.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재래시장 입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정이의 친구로부터 바쁜 날만이라도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못 이기는 척 친구 미용실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죽어도 다시는 미용실 일은 안 하겠다고 우기더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시 생활전선으로 돌아가는 미정이를 보고 춘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생활력이 강한 미정이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돈을 벌어 올 것이다.
춘자의 머릿속에는 벌써 명품 핸드백과 반짝반짝 빛나는 반지와 목걸이,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우아한 모습을 하며 성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변덕이 죽 끓는 미정이다.
남의 미용실에서 푼돈이나 버는 건 자기 체질이 아니라며 또 집에 처박혀 꼼짝도 안 하더니 새로 생긴 교회에 같이 가보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어울리지 않게 기도라도 하러 다녀오겠다고 외출을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로부터 새로운 사회생활을 해보라며 보험설계사 설명회에 나가보라고 권유를 받았다고 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진행되는 설명회에 참석만 하면 값 비싼 런치도 먹을 수 있고 교통비로 돈도 준단다.
속는 셈 치고 다녀오겠다고 외출했다 돌아온 미정이는 한껏 들뜬 얼굴로 이제야 자기의 천직을 만났다며 가는 눈이 더 가늘어지게 치켜뜨고 그 얇은 미소를 멈추지 않고 흥분하며 떠들어 댔다.
대기업 생명보험 회사에서 몇 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보험설계사의 길로 들어선 미정이는 다른 설계사에 비해 실적이 우수했다.
동그란 얼굴로 살살 애교를 부리며 얇은 입술로 온갖 혜택을 보장해 준다는데야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정이는 길게 말을 할 때 잠시도 숨을 쉬지도 않고 한다. 상대방이 생각을 할 시간을 단 1초도 주지 않는다.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재래시장 입구에 위치한 미정이의 친구 미용실은 미정이의 아지트가 되었다.
친구를 도와 아르바이트를 해 주는 척하면서 돈 좀 번다는 손님을 확보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 미용실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들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돈 많은 사장들이다.
돈은 많고, 마누라는 지겹고, 삶이 무미건조했던 그들은 미정이의 살살 녹는 보험설계 설명에 빠져 큰 금액의 보험에 거침없이 가입했다.
그렇게 미정이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보험여왕으로 등극했다.
춘자는 너무도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