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또 하나의 파탄

돈 보다 소중한 '정체성'을 상실한 막내아들

by Marisol

졸지에 불법 악덕사업자가 된 춘자는 세상이치에 대한 무지함과 그로 인한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대책도 없이,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우물 안에 빠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국세청에서 날아오는 '독촉장'에 겁에 질린 춘자는 언제라도 차압당할지 모르는 자신명의의 재산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자식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했다.


기획부동산 회사를 운영했던 큰아들 종태 역시 불법거래로 검찰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큰딸 미정이는 30억을 주겠다는 박사장의 헛 뻥을 믿고 대출을 받아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에 대출이자 납입 일이 코 앞에 다가오면 째지는 목소리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더욱이 양대표와 공동으로 보험설계 사무실을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춘자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딸 미영이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미영이의 명의로 이전하고, 막내아들 종민이가 살고 있는 변두리의 빌라를 종민이의 명의로 해 두었다.


명의 이전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할 참이긴 했다.


둘째 딸 미영이는 아이들의 아빠 이서방과는 헤어져 살고 있지만 이혼신고를 하지 않았다. 두 딸이 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할 때까지 아빠 없는 결손가정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강보험료와 양육비의 책임을 이서방에게 떠넘긴 이유로 미영이와 이서방은 아이들과 춘자가 있는 앞에서도 전화로 큰소리로 다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춘자는 머리가 지끈 아파서 춘자 방으로 들어와 또 묵주를 들고 성호를 긋는다.


큰아들의 불행과 두 딸의 평탄치 못한 생활이 마음에 걸려 춘자의 일상도 매일매일 우울했다.


그러고 보니, 막내아들 종민이는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동안 크게 걱정도 관심도 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춘자는 컥, 하고 양쪽 폐 속에서 올라오는 걸쭉하고 누런 가래 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아 쉰 기침을 해댔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이 없었던 막내아들 종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형과 누나들의 심부름을 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왕처럼 구는 형과 여왕노릇을 하는 큰누나의 등살에서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종민이만의 인생살이 방법을 그때부터 터득했던 것일까.


뚜렷한 인생의 목표도 없이,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도 없이, 어영부영 제 형과 누나의 그늘에서 그림자 노릇을 하며 충성봉사 했지만, 나이 50의 중년이 되었어도 이제까지 모은 돈도 없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된 것을 누구 탓을 하리.


춘자는 자기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형과 누나들이 시키는 대로 큰 사건 저지르지 않고 바보같이 살아온 막내아들이 '짠'하다고 생각해서 30년 전에 춘자 명의로 분양받고 그동안 전세를 주던 노후된 빌라에 살게 해 준 것이다. 자식들 아무도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값어치 없는 초라한 빌라였다.


그래도 30년 전, 새로 분양을 받았을 때에는 그 동네에서는 가장 세련되고 반듯했던 빌라였다.

이제는 술 주정뱅이가 지나가다가 오줌 한 번 싸고 발로 ‘톡’ 차기라도 하면 바로 무너질 것 같은 노후 빌라가 되었지만.


춘자는 큰딸 미정이의 보험설계 사무실에 다니며 받는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주말이면 골프를 치러 다니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돈과 세월을 허비하는 종민이를 보고 쯧쯧, 어차피 저렇게 살고 말걸 괜히 걱정했다보다, 하고 혀를 찼다.

허름한 빌라에 살면서 골프라니... 어떻게든 지금보다 나은 인생을 살라고 빌라를 넘겨주었건만.


춘자는 자신이 부유하지도 않으면서 값비싼 명품 핸드백과 화려한 옷차림, 보석이 박힌 액세서리를 치장하며 남들에게 자신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그 가증스럽고 사치스러운 유전인자가 자식들에게도 유전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종민아~! 너 지금 살고 있는 빌라 팔고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살래?

사무실에서도 가깝고, 동거인으로 거주자 명단에 올리면 네가 좋아하는 골프연습장이랑 헬스클럽, 수영장 같은 아파트 부대시설 공짜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니까 좋잖아~!”


보험설계사무실 공동대표 양사장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꽃게를 택배로 보냈다며,

제 아파트로 가족들을 불러낸 큰딸 미정이가 이번에는 순진하다 못해 바보 같은 막내아들 종민이에게 까지 검은 속내를 숨기고 달콤한 계략으로 종민이의 알량한 재산까지 탐내고 있다는 것을 춘자는 단박에 알아챘다.


얼마 전, 자주 어울려 다니던 부동산중개업자와 같이 방문했던 서울의 어느 재개발 아파트의 모델하우스에서, 그야말로 3초 이상 생각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송금하고 딸 수진이의 이름으로 아파트 매매계약을 했다고 들었다.


곧,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중도금 납입 일'이 다가오고 있었을 것이다.


춘자는 자기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새 둥우리에 바짝 붙어서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뱀 같은 미정이의 얇은 입술을 핏줄이 붉어진 사나운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지막 남은 자기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매처럼.


“엄마~! 종민아~! 박 사장을 내보내고 집에 남자가 없으니까 너무 무서워서 그래~!

집도 넓은데 수진이랑 둘이서만 있는데 엄마랑 종민이 넌 우리 걱정도 안 돼?”


철통 같은 경비시스템으로 외부인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튼튼한 아파트에 살면서 남자가 없어서 무서워 못살겠다니, 춘자는 어이가 없었다.


이서방을 내보내고 춘자와 미영이, 아직 어린 두 딸과 같이 사는 지 엄마는 여자가 아닌 남자인가?

게으른 딸년과 천방지축으로 버릇없이 까부는 두 손녀딸 치다꺼리로 춘자가 어떤 고통으로 살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결국, 종민이는 춘자가 큰 맘먹고 넘겨준 빌라를 깊은 고심도 없이 팔아 치우고 번화가에 있는 멋진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큰딸 미정이의 계략대로

종민이는 나이 50에 집도 절도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동거인’이 되었다.


게으른 누나 미정이의 술 심부름과 쓰레기 버리는 심부름 등 온갖 자잘한 심부름으로 일상을 보내며, 서른 살이 훌쩍 넘은 유학파 백수, 영어는 잘하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그야말로 영어만 잘하는 조카 수진이의 불평불만을 받아주면서 찌질하게 살고 있는 종민이를 보면서 춘자는 늘 하던 말을 읊조렸다.



니 인생이니까 니가 알아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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