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낳고 모든 것이 변했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도 아이와 함께 1살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랬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전혀 와 닿지 않던 말이었지만, 나도 이처럼 엄마로 새로 태어난 삶을 살게 되었다.
아이를 낳으니, 삶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순위가 밀렸다. 아이를 향한 사랑은 기존에 내가 알던 사랑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심지어 나에게 관심을 두는 것보다 아이를 더 좋아하거나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았다. 나의 아이가 칭찬받는 것이 곧 내가 칭찬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딸아이와 나는 분명 서로 다른 인격체인데도 이상하게 한 몸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울면 마음이 요동쳤고, 남편이 아이를 혼내기라도 하면 혼나는 사람은 아인데 마치 내가 혼나는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놀이터에서도 모르는 남자아이가 괜히 딸에게 다가오면 혹여 해코지하지 않을까 긴장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억지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했다. 하지만 진짜로 짓궂은 남자아이가 딸아이를 밀거나 때리기라도 하면 속에서 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보호 본능, 분노, 무력감이 한꺼번에 뒤섞였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꽃돼지’라 놀리며 장난쳤던 그 남자아이들. 그런 무의식이 지금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바로 낳으면 모성애가 바로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와 부대끼며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에 점점 스며드는 것이었다. 가랑비에 적시듯 말이다. 나는 아이를 나와 동일시하며 조금씩 엄마가 되어갔다.
결혼 전 한 3년 동안 앵무새를 키운 적이 있다. 사이가 좋았던 모란 앵무 한 쌍이었다. 몇 개월 후, 암컷이 알을 낳았다. 암컷은 수컷보다 먼저 키운 새였는데, 파란색이어서 파랑이라고 불렀다. 부리가 검은색이었던 아주 어린 애기 새였을 때부터 이유식을 먹여가며 애지중지 키웠다. 잘 길들여진 파랑이는 내 손을 잘 따랐고, 어깨에 앉아 놀곤 했다. 수컷 노랑이가 오고 알을 낳은 뒤 파랑이는 성격이 아주 예민해졌다. 알을 낳은 후에는 먹이를 주려고 새장 문을 열기만 해도 알통에서 재빠르게 달려들어 내 손을 세게 물었다. 물린 손은 어찌나 아프던지 집게에 찝힌 것처럼 자국이 오래 남았다.
나를 따르던 앵무새가 이렇게 변하다니, 배신감을 느꼈다. ‘알을 낳으면 이렇게 예민해질 수 있나? 나를 이렇게 물다니.’ 정말 속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제야 그때의 파랑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넌 내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엄마가 되니 그냥 본능적으로 예민해진 거였구나.’
이제 예민했던 앵무새 파랑이는 내가 되었다. 본능적으로 예민해지고,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때의 파랑이가 지금의 나를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본능과 감정이 새롭게 깨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몸 어딘가에 대해 몰랐던 새로운 기능이 숨겨져 있었나 보다. 엄마가 되면서 그 기능이 활성화된 것 같았다. 그것도 자동으로. 마치 만화 속 로봇이 어떤 버튼을 누르면 몰랐던 기능들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처럼 말이다. 버튼이 나도 모르게 엄마가 되는 순간 자동으로 눌리는 거였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