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선이 생기다
아기를 낳고 어느 날 텔레비전을 틀었다. 우연히 돌린 채널에서 세월호 아이들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사고 후 4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에도 큰 충격과 슬픔을 느꼈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 그날을 떠올리는 마음은 더 깊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없을 때 와 있을 때 느끼는 슬픔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부모가 되고 나니 그 아이들의 부모가 느꼈을 절망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내 아이가 그 차가운 바닷속에 있었다면, 숨조차 쉴 수 없고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진정한 위로나 공감이란, 아픔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운 것 같다. 너무 큰 슬픔 앞에서는 공기마저 슬퍼,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차가운 겨울 바다를 보며 "춥겠다"고 짐작하는 것과 직접 발을 담갔을 때의 그 극한의 추위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말이다.
첫째를 낳고 1년 후, 둘째를 임신했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임신은 모두 12주와 13주 차에 유산으로 끝났다. 첫째를 건강하게 임신하고 낳았기에 둘째도 자연스럽게 잘될 거로 생각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누구보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기에, 건강을 잃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나는 건강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건강마저 사라져 버리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쓸모없다는 느낌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임신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신이 더 건강하고 젊었을 때 이루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임신을 못 했다고 해서 내가 아예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임신은 건강을 떠나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일을 통제할 수 없었다. 모든 검사를 해봤지만,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유산을 겪은 후, 왜곡된 사고와 인지가 내 안에 자리 잡았고, 불안과 강박적인 생각에 휘둘리게 되었다.
이후 시험관을 시작했다. 3개월을 주기로 3번의 시험관에 도전했고 1년이 걸렸다. 채취는 3번, 이식은 1번 진행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난자를 채취하고 배아가 생성되었을 때 배아가 건강하지 않다고 들었다. 시험관을 준비하는 카페에 가입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의 과정도 자연스레 공유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20개 넘는 난자가 나오는데, 나처럼 난소의 기능이 저하되어 있는 사람은 10개 전후를 맴돌았다. 주사로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채취했지만 그중에서도 난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모두 폐기했고 3개월을 기다렸다가 다음 2차를 준비했다. 수량보다도 질적으로 좋은 난자가 더 중요했다.
그 후 건강을 돌보기 시작했다. 스트레칭, 등산, 매일 만 보 걷기 운동을 하며 매일 식단일기를 적었다. 몸에 좋다는 영양제도 챙겼다. 3개월 동안 5kg 이상을 감량했다. 2차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고 마지막 세 번째 채취에서 가장 건강한 배아 3개를 얻었다. 비록 이식은 실패했지만, 건강을 잘 관리한 덕분에 내 몸의 세포가 더 건강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다이어트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몸의 세포를 되살리는 생각으로 해야 하는 것이었다.
1년의 과정 이후, 시험관 시술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3개월 주기로 반복되는 과정이 힘들기도 했고, 너무 임신에 집착하며 매달리던 내가 잠시 여기서 거리를 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관 카페도 탈퇴했고 습관성유산이라는 이름의 단톡방도 탈퇴했다. ‘1주씩 뽀개기’라는 미션은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단편 시리즈 <오징어게임>처럼 단톡방에서 살아남아야 할 거 같은 초조함과 두려움이 있었다. 다음 주에 유산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을 주었다. 정작 임신이 된 사람들은 시험관 카페에도 없었다.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처럼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까지 함께 머물며 더 깊은 늪에서 한숨짓게 했다. 잘 되는 사람을 보며 부러워하고 말이다.
소개로 한의원에 가서 한약을 지어 먹었다. 이곳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몸을 휴식하면서 잠시 집착을 내려놓고 돌보고자 약을 지어 먹었는데 정말 둘째가 생기게 되었다. 종종 어떤 글에서 ‘임신을 포기했는데 아이가 생겼어요.’, ‘막상 안 가지려고 했는데 아이가 생겼어요.’ 하는 글을 보았는데 나도 마음을 잠깐 비워서 그랬던 건지. 시험관에 대한 마음을 놓았던 탓인지 정말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그 한의원의 한약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신에 성공했다.
임신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임신초기 하혈로 병원에 가서 호르몬 주사를 맞고 막달에는 전치태반으로 예정일보다 3주 정도 일찍 아이가 태어났다. 수술 도중 피가 반 이상 빠져나가 수혈을 두 팩이나 받았다. 수술해서 아이를 바로 만날 수 없었다. 고위험 산모여서 아이와 떨어져 지내다가 퇴원하는 날 아이를 만났다. 정말 힘든 시간을 거쳐 만나게 된 아이여서 그런지 더욱 무사히 아이를 만나게 된 순간이 감격스러웠다. 불안으로 마음을 졸였던 시간을 흘려보내고 만나고 싶었던 둘째를 품에 안게 되어 행복했다. 정말 감사했다. 둘째를 남편이 보여준 사진으로 먼저 보았는데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다.
둘째의 성별은 남자였다. 약 16주쯤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다소 모호하게 말씀하셨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60% 정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반의 남자아이들을 떠올리면, 짓궂고 장난만 치던, 별로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모든 남자아이가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 내가 좋아했던 남자아이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학창 시절의 짝사랑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억이 겹쳐 떠올랐다.
아무튼 배 속 아이와는 관계없는 남자아이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며 편견이 생겼다. 남자라고?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막연히 몸속 아이와 거리가 느껴졌다. 첫째가 딸이라 나중에 성별이 같으면 서로 아웅다웅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딸이어도 좋을 것 같았고, 친정엄마와 이모가 나이 들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좋아 보였다. 종손인 남편을 생각하면 아들을 낳아야 시댁에서 좋아하실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막상 남자아이를 낳고 보니, 그동안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걱정했던 시간은 아무 의미 없었다. 편견을 가질 필요도,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성별을 떠나 아기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나의 기도를 듣고 먼 시간에서 나를 찾아온 천사였다. 남자아이 옷이 이렇게 귀엽고 예쁜 줄 몰랐다. 딸 옷만 예쁜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줄이야. 그 작은 손짓, 웃음, 표정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녹였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