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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26

by 판도

하모는 오후 느지막이 양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공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계단을 올라 교정에 들어서자, 엄청나게 자란 상수리나무가 하모를 내려다보며 반겨 주었다. 그는 손바닥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과연 공산과 기만이 자랑한 대로 학교는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였고, 야외 교실 옆에는 멋들어진 강당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여전한 건, 본관 건물도 신축 강당도 외벽이 새하얗다는 것이었다.


야외 교실은 옛날보다 훨씬 근사했지만, 아이들 몇이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하모는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1부 행사는 끝났는데 이 애들은 뭐지? 선생들 모두 바로 옆 강당에 모여 있는데 겁도 없이 담배를 피우네.’


하모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을 쳐다보자, 한 아이가 하모의 눈길을 피하기는커녕 바닥에 침을 뱉어 하모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잔소리를 하려다 간신히 참고 고개를 돌리는데 이번에는 뒤통수로 어지러운 욕설이 날아들었다. 하모는 아이들 욕설도 참아내며 세월의 야속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던 자리인데…. 야외 교실에서 담배를 피운 애들은 없었는데, 그거참.’


하모는 자리를 피하여 본관 건물로 들어가 3학년 1반 교실을 찾았다. 천장에 에어컨이 달린 교실을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고장 난 실링팬 걱정도, 정전될 걱정도 없이 공부만 하면 되는 아이들이 부럽기만 했다.


‘이제야 학교가 학교다워졌네.’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 기분이 좋았다. 저런 애들만 빼고는 말이다. 그는 다시 건물을 나왔다.


강당에서는 사은의 밤 행사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을 터였다. 하모는 운동장을 지나 상수리나무 아래 벤치로 돌아왔다. 공산과 오붓하게 술 한잔하기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야외 교실보다 이곳이 훨씬 나아 보였다.


벤치에 앉는데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하모를 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모가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혹시, 방 선생님 아니십니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그의 주름진 얼굴은 무표정했다.

“누구신가요?”

“선생님, 접니다. 조하모. 공산 이사장님과 함께 학교 다녔던.”


그는 눈을 껌뻑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얼마 전에 이사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외국에 계시다 들어오셨다고. 제가 행사에 늦어서, 그럼 이만.”


갑작스러운 해후였지만, 그렇게 서먹하게 그가 돌아설 줄은 몰랐다. 그는 강당을 향해 걸어갔다. 되짚어 보니 이상했다. 공산은 방 교장을 초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파면을 시킨 마당에 행사 분위기만 망친다고 말이다. 하모가 바라보니 방 교장은 이미 강당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 교장이 사라지고 한 시간이 넘게 지나며, 교정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하모야, 거기도 좋네. 상수리나무 아래서 한잔하자.”


강당에서 나온 공산이 거나해진 목소리로 하모를 부르며 검정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동시에 공산의 뒤로 검은 물체가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공산의 등 뒤에서 쾅쾅거리는 굉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뒤이어 불기둥 위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끝이 아니었다. 다시 펑펑펑 고막을 찢는 폭음소리가 났다. 강당이었다. 그곳에서 화염 속에 갇힌 사람들 비명이 하모가 있는 벤치까지 울려 퍼졌다.

공산은 하모에게 등을 돌린 채 불타는 강당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그의 발밑으로는 검정 비닐봉지와 그 안에서 쏟아져 나왔을 캔맥주며 바나나며 과자 봉지가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불길 속에서 누군가 공산을 노려보았다.


하모 또한 불길 속에서 공산을 노려보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안순동, 바로 철탑에서 떨어져 죽은 안 선생이었다. 하모는 엄습하는 두려움에 눈을 감고 말았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꼬끼오 꼬꼬 꼬꼬’


닭이 울었다. 닭 울음소리는 메아리처럼 끝없이 주위를 맴돌았다. 마침내 울음소리가 잦아들 무렵, 화염에 휩싸인 공산이 돌아서서 외쳤다.


‘어제 내가 꿈을 꾸었어.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불타는 꿈, 그거 말이야. 좋은 꿈 맞지? 하모야, 빨리 학교 가자!’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불이 나면 빨간 집

타고나면 까만 집

아무것도 없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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