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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반딧불이

23

by 판도


독채 현관 앞에 서서 화단을 둘러보던 남자가 인기척에 돌아섰다. 흰색 스니커즈에 갈색 바지, 노란색 반소매 셔츠 위에 감색 카디건으로 한껏 멋을 부린 중년의 사내였다. 그러나 하모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기억하는 친구 공산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통통했던 볼살은 사라지고 두 볼은 파여 주름져 있었고, 광대뼈는 반대로 툭 튀어나와 도드라져 보였다. 학창 시절부터 고집한 장발만이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그런 그가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하며 애써 기억을 더듬던 하모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괴물, 영락없는 해탈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하모야, 대체 이게 얼마 만이냐?”


공산은 반갑게 하모를 껴안았다.


“그래. 산아, 반갑다. 세월이 흘러도 넌 변한 게 없구나.”


하모의 입에서는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하모의 말에 공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많이 늙었지. 너야말로 그대로다.”


웃는 표정만은 예전의 공산 모습 그대로였다. 하모는 포옹을 풀고 공산의 두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서울에서 만나면 되지, 바쁜데 뭐 하러 여기까지 내려와.”


공산은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귀공자님이 귀국하셨는데 감히 서울로 오라 할 수 있나. 이 미천한 공산이 내려와야지.”


“귀공자라. 그거참 아스라한 말이다. 다른 친구들은? 난 한 차로 내려오는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함께 내려오려고 했는데 다들 바쁘니 쉽지 않더라. 더구나 호석이는 오늘 못 내려와.”


“양호석이 못 내려온다고? 아쉽네. 그 녀석 만나면 할 말이 무척 많았는데. 그럼 기만이는?”


“회사 급한 일 처리하고 바로 온다고 했어. 곧 도착할 거다. 어, 마침 저기 오네.”


검은색 국산 고급 세단 한 대가 언덕을 올라오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기만은 예전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갖고 있었다. 밤송이머리도 여전했다. 카키색 트렌치코트는 그와 잘 어울렸지만 빛이 바랬고 구두도 열심히 광을 낸 흔적과는 달리 닳고 닳은 구두 뒤축이 어쩐지 고급 세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반갑다. 하모 맞지? 나, 기만이다. 용기만!”


“그래, 밤송이 용기만 사장님! 밖에서 만나면 못 알아보겠어. 진짜 멋있다. 자,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한잔해야지.”


하모는 기만에게도 속마음과 다른 말을 했다.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타고난 듯한 촌티가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여전했다.


하모가 마당에서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이 짐을 풀고 나왔다. 기만의 편한 옷차림이 정장보다 잘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들어왔어? 펜션을 하는 거 보니 잠깐 들어온 거 같지는 않은데.”


기만은 격조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귀국이 너무나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응. 전부 정리하고 들어왔어. 부모님이 여생은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셔서. 호주라는 나라, 참 좋은 곳이기는 한데 그곳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이민 생활이 쉽지만은 않더라. 인종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이잖아. 살기 좋은 곳이 삶을 마무리하기도 좋은 곳이겠지.”


“그런데 하모도 많이 늙었네. 옛날 얼굴은 남아 있지만.”


“많이 늙었지. 하지만 중요한 건 마음 아니냐. 살아보니 알게 된 건데, 마음은 늙지 않더라. 세상에 물드는 만큼, 욕심을 부리는 만큼 탁해질 뿐이지.”


“철학자가 다 되셨어, 우리 샌님 반장은.”


기만이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하모도 따라 웃으며 기만과 건배를 하고 공산을 바라보았다.


“공산인 학교 다닐 때의 악동 물이 완전히 빠졌는데?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고. 모델을 해도 될 거 같아.”


“그걸 말이라고 해? 공산 씨는 우리 모교 이사장님이잖아. 학교도 자사고로 바꿨다고. 얼마나 명문인데. 우리 다닐 때 하고는 차원이 달라. 좋은 학교 만들겠다고 애쓰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예전의 산이가 아니라니까. 학생들의 우상이라고.”


하모가 보기에 공산은 엄기만의 우상이었다. 기만은 누구에게도 아양 떨지 않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시절 기만은 공산과 어울려 놀기는 했지만, 항상 쏘아대고 잘난 척하는 그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말이다. 하모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알아. 나도 산이한테 전화로 소식 들었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장학사업도 열심이고.”


기만과 하모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공산이 껴들었다.


“별거 아니다. 엄마가 물주니까. 난 바지 이사장.”


“그런데 양호석이는 뭐 해?”


하모는 바쁘다고 내려오지 않은 양호석의 안부를 물었다. 기만이 대답했다.


“호석이는 판사 옷 벗고 지금은 변호사로 일한다. 로펌 대표 변호사.”


“치팅꾼 양호석이가 판사 해 먹고 대표 변호사까지? 참 웃기는 세상이다. 기만이 너는? 참, 쌀집은 어떻게 됐어? 아저씨가 계속하는 거야?”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지. 지금 살아계셔도 가게는 못 하셨을 거야. 대신에 내가 이어받았잖아.”


“아…. 아저씨가 돌아가셨구나. 그전에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기만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다들 먹고살기 바빴는데 뭘. 세월이 야속할 따름이지.”


“그래, 다음에 아저씨 성묘하러 갈 때는 나도 같이 가자. 그런데 사업은 잘되고?”


“응. 쌀 유통을 하는 협동조합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그럭저럭 괜찮아. 가공도 하고 직접 판매도 하고, 공 이사장님 학교에도 납품하고 있지.”


술잔을 주고받으며 친구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기만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아 참!”


“왜 그래?”


하모가 놀라서 묻는 말에 기만은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만. 차에 좀 갔다 올게. 하모한테 보여 줄 게 있다.”


잠시 후 돌아온 기만이 자리에 앉으며 하모에게 낡은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봐 봐.”


헤벌쭉 웃는 기만으로부터 노트를 받아 든 하모가 페이지를 넘겼다.


“어, 이건.”


하모가 눈을 크게 뜨고 기만과 공산을 바라보았다. 공산도 궁금해하며 노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뭔데 그래?”


그제야 기만이 껄껄 웃으며 신이 나서 떠들었다.


“닭대가리가 내동댕이친 악동 공산이 놈 숙제다.”


그러나 공산은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노트 속 그림은 몇 마리의 닭과 병아리, 그리고 달걀 몇 개가 어떻게 닭 천 마리가 되는지를 보여 주는 간단한 그림표와 같았다.


처음에는 분명 닭이 그려져 있었다. 닭 천 마리를 그려야 하는 지루한 숙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허무할 만큼 단순하게 이어진 그다음이 문제였다. 곧 점. 점. 점의 말줄임표, 그리고 병아리 몇 마리와 말줄임표, 다시 달걀 몇 개와 말줄임표. 그게 전부였다. 황당하게 끝나버린 숙제였다. 그리고 그 그림표 밑에는 공산의 친절한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 점. 점. 점 말줄임표는 달걀 천 개이고, 달걀이 부화해서 병아리 천 마리, 병아리가 커서 닭 천 마리가 됩니다.’


기발한 숙제였지만 하모는 웃을 수 없었다. 공산도 웃지 않았다. 취기에 떠들던 기만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모두가 한 사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며 술잔만이 오갔다. 하모는 그를 생각하다가 그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자신을 도와준 또 한 명의 친구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그의 안부가 뒤늦게 궁금해졌다.


“그런데 최강욱은 어떻게 지내? 강욱이도 보고 싶은데. 서로 연락 안 해?”


“…….”


둘 다 말이 없었다. 기만이 물끄러미 공산을 바라보았지만, 공산은 움켜쥔 빈 술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기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욱이 그 녀석 말이지…. 저세상으로 떠난 지 한참 됐다. 네가 중국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우리도 나중에 알았어. 가족끼리만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더라. 결혼도 하기 전이었고, 또 오랜 지병으로…”


“잠깐만.”


하모는 숨이 막혔다. 꾀병쟁이 최강욱이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었다. 기만이 말을 이었다.


“강욱이가 3학년 때 몸이 아프다고 학교에 나오질 않았잖아. 우린 그게 다 뻥이라고 녀석을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더라고.”


“거짓말! 너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하모는 최강욱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걸 믿으란 말인가?


“백혈병이었다더라. 그게 낫고 도지기를 반복했던 거지.”


“기만아, 거기까지만 하자.”


침묵하던 공산이 입을 열었다.


“우리 말이야. 과거를 잊으면 안 되겠지만 얽매여 살지는 말자. 사실 나 말이다. 거기서, 그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 이제는 밝은 생각, 좋은 생각만 하고 살고 싶다.”


고개를 끄덕인 기만이 두 사람 잔에 술을 따르며 공산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오늘같이 좋은 날에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자 한잔하자!”


하모는 두 사람과 잔을 맞부딪쳤지만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공산의 말이 이해는 되었지만, 최강욱을 대하던 그 시절 공산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착잡했다. 그에게 속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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