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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생쥐

팔라스 드 레이 가는 길 (Palas de Rei)

by 양작가

10월 25일 알베르게 마뉴엘에서의 밤

마뉴엘 알베르게에서의 밤, 가을비는 뼛속까지 스며들 듯 차가웠다.

처음에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낡은 담요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잠들기 전에 침낭 위에 깔았다. 비에 젖은 몸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고, 침낭 하나로는 한기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내 옆에서 조용히 지내던 한국인 아저씨는 어느새 깊이 잠들었고, 예상했던 대로 코를 고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내 예상이 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코를 고는 이유 중 하나는 피로가 극에 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본인의 페이스를 신경 쓰지 않고 무리하게 걸으면 더욱 그렇다. 오버 페이스는 마라톤이든, 산티아고 순례길이든, 아니면 인생이든 몸과 마음에 무리를 주는 건 매한가지다. 스스로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결국 끝까지 나아가는 길이라는 걸, 이곳에서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신비로운 길:
성 야고보 기사단의 신비로운 안식처로 우회할 시간을 낼 것인가?
여기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조각상이 이 신성한 사원의 벽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순례자는 두 길을 동시에 여행해야 한다. 관광객은 신성한 순례자의 돌 동상이 있는 곳을 찾을 것이다.

오늘 당신은 시간을 내어 내면의 신비로 들어갈 수 있나요?

어리석은 이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이는 행복을 발밑에서 키웁니다.
-JR 오펜 하이머
자료출처: A Guidebook to the Camino de Santiago -Joha Brierley


출발:Portomarin> Toxibó4.9km > Gonzar7.9 km > Castromaior9.3 km > Hospital da Cruz 11.7km > Ventas de Narón 13.2km > Ligonde 16.2km > Airexe 17.3km > Portos 19.4km > Lestedo 20km > Os Valos 20.8km > A Brea 22.0km > Palas de Rei 24.8km
총 거리: 24.8km
출발 시간: 8시 15분
도착시간: 16시 9분




2023년 10월 26일 아침 / 날씨: 폭우, 흐림, 비 옴, 무지개 반복


아침 해가 밝았지만, 밤새 내리던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짐을 챙겨 피아의 숙소에서 만나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숙소에 묵었던 순례자들 중 누구도 배낭을 동키 서비스로 보내지 않았다.

옆 침대에서 밤새 코를 골던 아저씨는 급수팩이 터졌는지 방 안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는 아무런 뒷정리도 하지 않은 채 떠났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산티아고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포르토마린부터는 새로운 디자인의 택배 봉투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격도 5유로, 4유로로 내려갔다. 나는 미리 챙겨 둔 무칠라 봉투를 가지고 피아의 숙소로 가서, 그곳에서 배낭을 보내기로 했다.



Casa San Nicolas / 8시 15분 출발

피아가 묵고 있는 Casa San Nicolas까지는 280m 정도 걸어가 가방을 함께 부치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이 지역에서 제공하는 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던 택배 회사의 봉투를 배낭에 붙였다. 이 봉투를 챙겨 둔 이유는 단순했다. 이 회사의 좋은 취지가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더 이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가방을 내가 도착할 팔라스 드 레이의 알베르게까지 안전하게 배달해 줄 거라 철석같이 믿으며 말이다. 하지만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지배인이 해준 설명 중 뒷부분은 까맣게 잊고, 좋은 취지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까사 산 니콜라스는 입구부터 고급스러운 소파가 놓여 있었고,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하도록 카드키 시스템이 적용된 깔끔한 호텔이었다. 나는 잔돈이 없어서 프런트에서 잔돈을 바꾼 후, 이곳에서 내 배낭을 "올라 무칠라" 택배로 맡겼다. 다행이라면, 이곳이 호텔이라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더라도 내 배낭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피아와 가브리엘, 그리고 써니가 60리터짜리 무거운 배낭을 메고 프런트로 내려왔다.

아침 8시 15분, 짐을 맡기고 판초우의를 걸친 후, 신발 위에 스패츠를 덮었다. 이제 다시 길을 나설 시간이다.


¡Vamos!


마을을 돌아 나오며, 포르토마린에서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던 미군 퇴역군인 순례자 스티브 아저씨가 계시는 Hotel Ferramenteiro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스티브 아저씨와 부인분이 호텔 앞에 계셨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이 게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스티브 아저씨의 부인분은 순례길을 직접 걷지 않고, 택시로 이동하며 고급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올수록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렸다.


오늘 무사히 Palas de Rei까지 걸을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브앤까미노앱>카미노웨이앱>카미노 원서 가이드북 자료

갈림길과 변형 루트

9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해가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포르토마린’이라 적힌 이니셜을 등지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처음 마을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포르토마린을 떠났다. 여기서부터가 정말 헷갈리는 구간이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사용하는 앱마다 각기 다른 경로를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늘 길은 갈림길이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가든 최종 목적지는 팔라스 드 레이였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첫 번째 갈림길이 나타났고, 어두운 새벽 비 내리는 길 위에서 순례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 순간, 길이 정체되었다.

Buen Camino 앱에서는 포르토마린에서 San Roque까지 벨사사르 저수지를 따라 내려가는 길을 추천하고 있었다. 반면, Frances: Camino Way 앱과 가이드북, 그리고 Camino Ninja 앱에서는 San Roque로 가지 않고, 바로 4.9km 지점에 위치한 Toxibó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Camino Ninja에서 안내하는 경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카미노 웨이 앱 지도


Gonzar 갈림길

초반의 길은 계속해서 완만한 경사의 언덕을 올라가는 길이다.

우왕좌왕하다가 곤자르에서 다시 갈림길을 만났다. 처음의 당황스러움과 달리 이곳은 그리 큰 갈림길은 아니다. 배낭도 메지 않고 걷는 길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어떤 순례자에게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모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뒤따라오는 순례자들과 앞서 가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잠시 서로의 길을 멈추고 논의를 했다. 만약 내가 처음 걸었을 때처럼 홀로 걷고 짐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무조건 안전하고 느린 길을 택했을 것이다.



LU-633/ 장애를 넘어선 순례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갈림길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결국 우리의 결정은 LU-633도로 시작점에서 도로를 벗어나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숲길을 빠져나오는데 비가 무섭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가브리엘과 써니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시아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피아, 게일과 함께 한 조가 되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잠시 멈출 수 있는 피난처가 있어, 우리는 비가 조금이라도 잦아들길 기대하며 세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벙커 대피소에서 순례자들이 비를 뚫고 지나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 길은 하늘로 길게 뻗은 참나무들과 순례자 유적지가 보이는 길이라, 볼거리가 많은 길이었다.

비를 피하고 있을 때 본 장면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순례길을 종주하고 있는 장애인 순례자 한 분을 위해 휠체어를 들고 이고, 총 4명의 헬퍼들이 영상 촬영까지 하며 비를 뚫고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비를 맞으며 몸에서 아지랑이 열기가 올라왔다. 특히 장애인 분은 다리가 쭉 펴지는 반 누운 형태의 휠체어를 타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보다 배로 많은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휠체어를 굴리며 가고 있었다.


나는 한 번 다리 인대가 끊어져 한 달을 집에서 누워만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깁스를 풀고 발목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려고 한 달 동안 재활 치료를 받았다. 그때 이후로 나는 땅에 발을 디디는 것에 굉장히 민감해졌다. 그런데 하체를 전혀 쓰지 못하는 분이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일반 사람보다 몇 배 더 많은 에너지와 힘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Hospital da Cruz

Hospital에 있는 산티아고 비석 앞에서, 이제 78.1km가 남았다는 비석을 보며 잠시 멈추고 기록을 남겼다.

길을 걷는 동안 몇 명의 피아와 얼굴을 익힌 순례자들을 만났다. 멕시코에서 온 마리안, 그리고 미국 출신의 로렌도 그중 하나였다. 로렌과 피아와 함께 이 비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짧은 만남의 순간을 간직했다.



Meson Labrador

그때 빗줄기가 내 신발에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패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어텍스 신발의 방수 기능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가 굵게 내리기 시작했다. 발끝까지 스며드는 빗물이 신발 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수영장에 물을 가둔 것처럼 신발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내 발은 점점 띵띵 불기 시작했다.


비석을 지나자마자 한참을 걸어가다 나타난 두 번째 카페로, 게일과 나, 피아, 그리고 로렌까지 함께 거세지는 비를 피하러 들어갔다. 우리 꼴이 정말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딱 거지꼴이 이거다 싶었는데, 그 와중에도 기념사진에서는 표정이 너무나 해맑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우리 안의 찌든 때까지 깨끗하게 씻어낸 듯,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실제로 비는 정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비를 뚫고 나아가는 이 길이 춥고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가벼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카페콘레체와 홍차로 몸을 녹이고, 잠시 카페를 지키는 노란 고양이와 시간을 보내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카페를 빠져나온 후, 길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다. 갑자기 비가 그치더니 해가 나타났다. 습한 날씨 속에서 슈퍼마리오 게임에 나올 법한 큰 버섯이 우산처럼 활짝 펼쳐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식물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추위와 배고픔

비가 내리고 추웠고, 온몸이 젖어 배도 고프고 쉬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먹은 건 비를 피해 마셨던 카페 콘레체 한잔뿐이었다.

오늘 길은 언덕 구간도 많고, 비가 내려서 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휴식 공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구간이었다.


게다가 가브리엘과 써니가 너무 빨리 걸어버린 탓에, 피아는 길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 마음이 급해져서 더 이상 쉬지 않고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보통 20km를 천천히 걷는데, 오늘은 짐이 없어서 25km를 걸을 수 있었다.


온몸이 지친 상태에서, 어쩌면 나는 이 두 분을 먼저 보내고 혼자 걷는 게 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반부에 우연히 발견한 음식점에서는 아직 점심시간이 아니어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비를 맞아서인지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게일과 피아는 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피아는 마음이 급해 보였다. 나는 카페에서 더 이상 토스트를 먹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두 분은 시원찮은 반응을 보였고, 결국 카페를 빠져나왔다.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사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건 배가 고프면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진짜 화를 낸다.


피아와 게일은 내가 길을 걸으며 가장 아끼고 가족처럼 사랑하는 두 분이다. 그런데 옆에서 게일과 피아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과일과 초콜릿을 줄까? 하며 나를 타이르는데 체력적으로 지치면서 점점 나는 화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앉아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피아와 게일은 내가 화를 낸 이유를 알지 못해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정확히 쉬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고, 피아는 빨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냥 두 분을 보내고 화를 낼 게 아니라, 혼자 천천히 걷겠다 말하고 혼자 쉬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 그 일이 아직도 마음속에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게일과 피아 두 분은 70을 넘어 80에 가까운 나이의 어르신들인데, 내가 힘들다고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Iglesia de Santiago de Eirexe

갈리시아 지방의 십자가들은 개성이 다양해서 유적지와 볼거리가 풍부했다. Airexe에 있던 순례자 묘지와 작은 예배당이 눈에 띄었다. 비를 쫄딱 맞고 걷다가 해가 나면서 무지개가 나타났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Thank you!"라고 계속 외치며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날씨가 좋아진 것에 대해서도 정말 감사함을 느끼며 걸었다.


팔라스 드 레이 도착 전, 길게 뻗은 참나무 숲은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숲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숲을 빠져나오며 날씨도 맑아졌고, 몸을 말리며 기쁨의 세리머니를 나누었다.



오늘도 우리는 해냈다


팔라스 드 레이 도착 / Zendoira 16시 9분


팔라스 드 레이 입구, 올망졸망 모여 있는 유적지와 숙소들을 지나, 게일이 먼저 숙소 방향을 찾아 자연스럽게 팀이 해산되었다. 피아는 가브리엘과 써니를 찾아 숙소 체크인을 함께 해야 했다.

나 역시 Zendoira라는 숙소를 예약해 두었다.

숙소에 도착하면 내 가방이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을 입구에서 구글 지도를 켜고 마을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중에 저녁에 보자며 인사를 나누었다.

숙소는 마을 제일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오늘 같은 궂은 날씨에 짐을 보낸 게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신발 안에 젖은 양말과 여분으로 남아 있는 물까지 무겁게 발을 떼며 무거워진 신발을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다.

숙소 외관은 지금까지 본 알베르게들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건물에 가까웠다. 레온에서 묵었던 캡슐 형태의 커튼이 있는 대형 숙소가 떠올랐다.


배낭이 도착하지 않았다.


포르토마린에서 묵었던 알베르게 마요르처럼 아주 고요하고 개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프런트 옆에는 함께 운영하는 음식점이 있었고, 공유 주방과 거실이 아주 넓게 운영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대형 숙소였다. 숙소는 미로처럼 얽힌 방으로 들어가기 전 체크인을 하며 프런트 앞에 줄지어 놓여 있는 가방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나와 비슷한 색깔의 가방이 보여서 오늘도 무사히 도착한 가방에 감사함을 표했으나,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나에게 체크인을 해주던 지배인은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갑자기 무심하던 표정이 사라지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최대한 차분히 호스트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내가 신청했던 회사가 작은 회사라 연락을 해서 픽업하라고 했어야 한다는 트리아카스텔라에서 호스트가 했던 마지막 멘트가 이제야 떠올랐다.


하아... 미쳤다, 진짜. 어떡하지?"


지배인: "무슨 일이야?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줄게!"

나: "아무래도 배낭이 포르토마린 숙소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아요.

잠시만요.

그 숙소 주소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택배회사 번호도요."

(만약을 대비해 항상 택배회사 번호와 묵었던 숙소 주소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단 내가 짐을 보낸 장소가 포르토마린에 있는 피아가 머물던 호텔 Casa San Nicolás여서, 바로 지배인이 그곳에 전화해 배낭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Hola! Mocila 택배 회사 봉투를 호스트에게 건네주었다. 주변에서 나의 배달 지연 사고를 옆에서 보고 있던 순례자들은 어느새 나를 위로하며 진정시키는 분위기가 되었다.


정말 정신없이 순례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갑자기 정적이 일어난 듯 조용해졌다. 나는 하얗게 질려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배인은 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이곳 팔라스 드 레이에 있는 숙소에 짐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짐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대신해 주었다. 차갑고 무서운 표정과 달리, 진짜 위기의 상황이 되자 빨리 달려와 가장 힘들고 약한 부분을 해결해 주어서 정말 감동적이었다.

지배인: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이야기해 놨어. 그리고 올라! 무칠라에 왓츠앱으로 연락해서 주소와 가방 사진을 보내주면 도움이 될 거야."

나: "정말 고마워요."


멘털붕괴

나는 700km나 걸었다며 으스대고 기고만장했었다. 그런데 배낭 지연 사고가 나자마자, 다시 파리에 왔을 때처럼 멘털이 나가버렸다. 하…

세상 절대 혼자 살 수 없다.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앞으로 나갈 수 있구나. 아까 길에서 마주친 장애인 순례자 팀들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 내 상태를 파악해 보니, 보조 가방과 지금 입고 있는 옷, 여권, 지갑, 충전기가 전부였다. 진짜 배낭을 잃어버렸다면 길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동안 걸었던 길과, 길을 걷던 중 아나가 가방을 잃어버렸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나는 체크인을 받은 방의 캡슐 침대에 앉아, 몸이 젖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멍하니 털썩 주저앉았다.


숙소 풍경

방의 입구에는 이탈리아 무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은 그래도 조용한 분위기가 됐다.

내 자리 쪽에는 중국인 순례자 두 명이 따라 들어왔고, 내 옆쪽에는 자전거 순례자들이 홀딱 젖은 채 방으로 연이어 들어왔다. 나는 일단 지배인에게 받은 택배회사 대표번호를 받아서 왓츠앱으로 가방 모양이 찍힌 사진과 내 이름, 그리고 짐이 있는 포르토마린의 숙소, 짐이 배송되지 않아 많이 놀란 상태라는 말과 짐을 배송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며 미안하다는 내용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택배 담당자 역시 내 소식에 꽤 놀란 상황이었다. 올라 무칠라는 사실 트리아카스텔라에 위치한 신생 작은 회사라 전 구간을 운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자동차를 몰고 내 배낭을 픽업해 팔라스 드 레이까지 90km나 되는 거리를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배달하기 위해 오고 있으니 안심하고 기다리라며 친절한 대답이 왔다.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로 샤워도 못하고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들 내 소문을 듣고 나를 달래기 위해 옆에 있던 중국 순례자와 옆에 있던 자전거 순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두 시간 후,,,


18시가 넘은 시각, 두 시간이 지난 후 숙소에 짐이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그제야 짐을 가지러 프런트로 내려갔다. 가방을 픽업하려는 찰나, 아까 피아의 지인인 멕시코 순례자 마리안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물었는데,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마리안은 너무 놀라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더니, 나를 꼭 안아주며 달래줬다.

나는 배송 지연 사고에 대해 얘기해 주고, 다행히 배낭이 무사히 도착해서 이제야 짐을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산티아고의 후반 길에서 조차 나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가방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는 사고가 간혹 있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었지만, 그 당사자가 내가 될 뻔한 경험은 간담이 서늘해지게 했다. 말 그대로 전기충격을 받은 듯한 경험 덕분에 하루 종일 물속을 허우적거리다 전기충격을 받은 것처럼 얼이 나가버렸다. 눈물을 쏙 빼고, 외롭고 두렵고 무서운 감정들이 밖으로 다 토해내듯이 튀어나와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배낭을 들고 오는 나를 보며 숙소 방 입구에 있던 이탈리아 순례자들이 순한 레트리버들처럼 나를 바라보며 위로해 주었다. 그들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내 침대로 가는 중간 통로 자리와 내 자리 양쪽에서 함께 걱정을 해준 순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다시 구름이 모여들고, 다시 비를 뿌릴 준비를 하는 듯했다.


여기서 배운 교훈!!!

절대 체크!!!!!


후반길을 무탈하게 걸어가기를 빌며, 배낭을 배송으로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Hola! Mochila 담당자의 친절함과 이곳 까미노에서 어려움에 처한 순례자를 돕기 위해 호스트와 숙소에 있던 순례자들 덕분에 이 일은 단순 지연 사고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마침 배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내 침대 쪽으로 온 미국인 순례자 마크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안부를 물었다. 젠도이라에 있던 순례자들은 아마 다 알만큼 소문이 났던 것 같다.

트리아카스텔라 가는 길에 프랑스 할머니처럼 목놓아 울었던 이날, 긴장이 풀리자 어이없게도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울어서 뚱뚱 부운 눈으로, 몸은 여전히 온 지 2시간이 넘었는데도 샤워를 못했기 때문에 아마 몸에서 쉰내가 났을 것 같다.

마크는 내가 아는 순례자 중 가장 쿨한 사람이었는데, 미국 유타 출신이다. 말도 빠르고, 미국식 농담을 건네며 긴장을 풀어줬다.

나는 오늘 가방 지연 사고 때문에 함께 저녁을 먹기 힘들 것 같다는 문자를 피아에게 보냈으나,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배낭 덕분에 씻고 나올 만큼 시간 여유가 생겼다. 출입문 바로 옆에 있는 샤워실 바로 앞에 있던 이탈리아 무리 중 유일한 여자분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것도 발음이 꽤 정확하게!

긴장이 풀리자 이탈리안들과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나는 젖은 옷가지와 양말, 속옷을 빨아서 건조대에 널어놨었는데, 정말 판단 미스였다.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면서 바깥에 널었던 건조대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이때 건조기를 돌릴 걸 후회가 밀려왔다.



피아와 게일의 문자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면, 피아가 묵고 있는 숙소로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가족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신 덕분에 나는 어느새 피아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게일에게도 오늘 힘든 날이었지만 함께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감사함을 표현한다.

게일은 너와 걷은 것은 언제든 환영한다는 답이 왔다. 배낭사고로 멘털이 나간 상황에서 숙소에 앉아 그간의 배낭을 들고 걸었던 기억들과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걸을지에 대한 허무함과 망연자실 게다가 오늘 화까지 낸 것에 대한 후회감이 복합적으로 밀려 들어왔다.


젖은 신발

샤워와 짐 정리를 마친 후, 나는 젖은 신발을 말리러 신발장과 빨래방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젠도이라에 있는 신발 건조기에 50센트를 넣고 신발에 건조기 호수를 꽂아 넣었는데, 돈통이 꽉 차서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하하, 웃음만 나왔다. 오늘 일진이 뭐 이렇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스트에게 돈통이 꽉 차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50센트를 환불해 주었다.

내일부터는 더 젖지 않기 위해 신발 안에 비닐봉지를 신고 신발을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에 다시 올라가 가지고 다니던 드라이기를 가지고 지하 빨래방으로 내려가서 신발을 드라이기로 말리기 시작했다.


Dia Supermarket/ 4.98유로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내일 길에서 먹을 비상식량들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Dia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숙소와 아주 가까워서 만족스러웠다.

슈퍼에는 아까 숙소 방 입구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던 유일한 여자 이탈리안 순례자 '로'와 미국인 순례자 '마크'가 함께 장을 보고 있었다.


로는 이제 괜찮냐며 안부를 물었는데, 나는 진짜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지만 슈퍼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와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로는 나를 토닥이며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겠냐며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비상식량과 저녁거리를 구매했다.

공유주방

숙소로 돌아와 공유주방으로 가니 중국 순례자들이 오는 길에 주워온 밤을 한 솥 쪄서 까먹고 있었다.

와! 진심 부럽다.

여유롭게 길을 온전히 즐기며 왔다고 느껴져서 말이다.

나는 배낭을 잃어버린 충격에 입맛이 없다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응급 시 늘 가지고 다니던 농심 순라면을 꺼내서 끓여 먹기 시작했다. 옆에서 샌드위치를 만들던 로가 이탈리안 답게 요리를 아주 엄격하게 준비 중이었다.

역시 비 오는 날은 뜨끈한 라면이 제격이다. 라면은 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 라면 한 입을 국물까지 덜어서 앞접시에 로 에게 건넸다.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나는 로에게 라면을 건네며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 사실 말이야,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 데서나 울지 않아.


로는 차분하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로: 앞으로는 온전히 너의 어깨로 짐을 느끼며 걸으면 좋을 것 같아. 짐을 동키로 안 보낼 거지?

그리고 걱정 안 해도 돼. 나 사실 예전 남자친구가 한국사람이었어. 그래서 한국사람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어.

어쩐지 인사를 정말 정중히 잘하더라니! 생각했다.


중국 순례자들은 해바라기 씨 대신 열심히 밤을 까먹고 있었고, 그 양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나는 중국 사람들이 평상시 해바라기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견과류를 먹으면서 눈이 뒤집힐 정도로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스페인에서 이 광경이 얼마나 웃겼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진지함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중국인 뒤에 있던 이 또한 기이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분과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한국인 아저씨는 밥을 한 솥 지어서 그 위에 고추장을 비벼 먹고 있었다. 모두에게 고되고 힘든 하루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먹으며 주변 풍경을 보니,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 이곳 공용 공간에 모여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재밌고 생동감 넘쳐 보였다. 식사를 하는 공유 주방의 모습과는 달리, 공용 거실은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공용거실

공용 거실은 물집이나 인대 등 상처를 치유하거나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 역시 긴장을 풀기 위해 사 왔던 맥주를 한 캔 마시고 잠시 소파에 앉아 쉬고 있다가, 피아는 저녁 7시 30분에 음식점이 문을 여니까 마음이 바뀌면 오라고 했던 문자가 생각났다. 혼자 방에 누워 있으면 다시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아 피아가 있는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Pensión Restaurante Casa Camiño

이곳은 팔라스 드 레이의 메인 시내이다. 바로 앞에 교회 예배당과 시청사가 위치해 있었다. 팔라스 드 레이는 마치 한남동 언덕길에 있는 전시장을 보러 가는 느낌이 들었다. 입구를 한참 찾아다녔는데, 입구 쪽에서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남자분이 보였다. 처음엔 게일인 줄 모르고 지나쳤다. 다시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하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이곳은 내가 머무는 숙소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아늑하며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가브리엘과 써니, 그리고 피아가 내려와 인사를 나눴다.

나는 가브리엘에게 배낭 지연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잃어버린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고, 클라이맥스로 배낭을 되찾은 이야기와 긴장이 풀려서 펑펑, 그것도 두 번이나 울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안도하는 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영국 사람과 미국 사람의 표현 방식의 차이였다. 미국계 베로니카와 캐나다인 캐시의 경우 소식을 듣고 본인들이 더 황당해하며 리액션을 해줬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이 그렇듯 나에게 위로해 줄까? 안아줄까? 이렇게 물어봤다. 나는 이 부분이 참 좋게 느껴졌다.

큰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포옹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말이다.

열 마디 말보다도 따뜻하고 위로가 된다.


갈리시아 지방은 늘 춥고 습한 날씨 때문 인지 한국과 비슷한 국물 요리가 있다. 갈리시아 수프는 마치 감자탕 국물 같아서 먹기 편했다. 나는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으나, 또 저녁을 코스로 피아 가족들과 게일과 함께 먹고 있었다. 꽤 넉넉한 저녁과 여유롭게 수다를 떨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오늘 미안했다며 써니가 본인이 대신 내신다고 하셨다. 빨리 가는 게 잘못은 아닌데, 피아가 오늘 일을 얘기했었던 것 같아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와인 한 병에 고기에 꽤 배가 터지게 먹어서 가격이 나왔을 텐데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인사를 한 후,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길을 비를 맞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가 가장 멀리 있는 나는 그곳에서 식당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무사히 하루를 마친 것에 감사하며 내일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피아, 게일, 써니, 가브리엘과 후반부 길을 함께 걸으며 풍요롭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하고 감사했다.

진짜 가족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내일부터는 비가 와도 매일 배낭을 메고 걸을 것이다.

오늘 정말 긴 하루였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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