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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닿는 길

오 페드로조 가는 길 (O pedrouzo)

by 양작가



출발: Ribadiso 0.0km > Arzúa 3.1km > Pregontoño 5.3km > As Quintas(Burres) 8.0km > A Calzada 8.9km > A Calle de Ferreiros 10.6km > A Salceda 14.2km > A Brea(O Pino) 16.5km > Santa Irene 19.1km > A Rúa 20.8km > O Pedrouzo 22.3km
출발시각: 오전 8시 30분
도착시각: 오후 16시 02분


2023년 10월 28일 아침 출발 전/ 여전히 비 그리고 맞바람

숙소에 있던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길을 서둘렀다. 8시가 되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해가 떠도 곧 비가 내릴 듯했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숙소를 떠난 뒤, 나와 캐나다에서 온 한 아줌마만이 남아 천천히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마침 숙소 로비에서 가브리엘을 마주쳤다. 그녀는 60리터짜리 가방을 동키 서비스로 보내기 위해 무겁게 몸을 옮기고 있었다. 포르토마린에서 배낭이 지연되는 일을 겪은 후, 나는 더 이상 가방을 맡기지 않기로 했다. 무겁고 힘들어도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와 땀의 결과를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원래 리바디소 숙소 앞에 있는 유일한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불친절했던 웨이터의 태도를 떠올리자 피아와 써니는 손사래를 치며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망설임 없이 길을 떠났다.


출발 8시 30분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는 리바디소의 언덕길을 빠져나가야 한다. 게일은 다음 도시인 Arzúa에서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4km를 덜 걷는 일정이라 조금은 수월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어제보다는 비도 덜 내리고 있다.

이제 순례길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길 위의 순례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굴을 익히며 친숙해졌다.

하지만 이 길에서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은 드물다. 더 이상의 폭우나 뜻밖의 해프닝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프랑스길에서는 결론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길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Arzúa

아르주아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마치 온순한 둘레길처럼 느껴졌다. 사리아처럼, 아르주아 역시 모든 것이 순례자들을 위해 조성된 도시처럼 보였다.

도시의 입구에 다다르자, 커다란 순례자 그래피티 작품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마치 환영 인사를 건네듯, 하늘에는 선명한 무지개가 활짝 떠올랐다.




Pastelería A Lua

게일이 합류한 뒤, 우리는 성당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들어간 빵집은 완전히 로컬 분위기였고, 순례자들을 반기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직원들의 태도는 냉랭했고, 심지어 자리가 부족해 앉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우리는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모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에 젖은 우리의 행색이 반갑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느낀 미묘한 인종차별적 분위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마을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서, 산티아고 교구 교회 너머로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그 풍경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원래 아르주아에서 피아의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아침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결국 식사는 포기한 채 다시 길을 걸어야 했다. 아르주아는 꽤 큰 도시였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Hijas de Santa María dela Providencia, Guanelianas
이하스 데 산타 마리아 데 라 프로비덴시아의 수녀들이 순례길에 있는 아르주아 마을의 나가는 길목에서 순자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연락처: +34604392272/ +34981501226
자료: Buen Camino app

빠르게 리바디소를 벗어나 아르주아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아침을 거른 채 걷고 있었다. 하루를 늦게 시작한 만큼 오전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했다.

아르주아를 빠져나오던 길에, 우리는 순례길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는 수녀님을 만났다. 나는 이곳에서 도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지 못했지만, 반갑게 맞아 주시는 수녀님 덕분에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도장을 받았다. 그분은 꽤 젊어 보였고, 흔쾌히 사진 촬영에도 응해 주셨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이런 뜻밖의 순간들이 여행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목에서, 수녀님은 순례자들에게 물을 나눠 주고 스탬프를 찍어 주시며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작은 이벤트처럼 보였지만, 지친 순례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순간이었다.

800km에 이르는 전체 여정을 생각하면 막막할 때도 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매일의 여정이다. 오늘의 목표인 20km는 숫자로만 봐도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10월 하반기에 접어든 지금, 뜨거운 태양은 사라지고 매일같이 비가 내리고 있다.



갈리시아 지역은 원래 비가 자주 오는 곳이었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익숙해질 즈음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비를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보통 첫 5km까지는 어렵지 않게 몸을 풀며 산책하듯 걷는다. 마치 몸이 리듬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오전의 걸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이것이 새벽 공기의 마법인지, 아니면 순례길을 걸으며 몸이 익숙해진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늘 오전 12시까지의 걸음은 오후보다 한결 가볍고 속도도 빨랐다.


점심 /A granxa de Tato/A Peroxa

Pregontoño(프레고토뇨)를 지나며

우리는 다시 쏟아지는 폭우 속을 뚫고 걸었다. 그리고 순례자들로 북적이는 작은 카페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피했다.

아침도 먹지 못한 채 걷고 있었기에,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보이는 카페로 곧장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함께 걸으며, 또 각자 걸으며. 모든 순간을 글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순례길의 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A Granxa de Tato, 웃음이 가득한 카페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자그마한 계산대에서 주인장이 혼자 분주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들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매번 농담을 건넸다.

우리는 젖은 우비를 벗어두고 카페 내부 원탁 의자에 앉았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오직 따뜻한 음식만이 간절했다.

주문대에서는 프랑스에서 온 어린 여자 순례자와 주인장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그녀는 빠른 주문을 원했지만, 주인장은 익숙한 농담으로 응수했다. 결국 그녀는 밖으로 나가 “저 사장님이 나한테 장난친다”며 투덜거렸고,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주인장은 더욱 장난을 걸었다. 결국 그녀의 친구가 다시 와서 “이 친구가 성격이 급해서 그렇다”며 대신 주문을 마쳤다. 본인에게는 답답한 상황이었겠지만, 그 모습을 구경하는 우리는 꽤나 흥미로운 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 지친 순례자들에게 작은 웃음을 선사한, 마치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프랑스 톰보이 스타일의 그녀 덕분이었다.


프로도의 마을 같은 곳에서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주문대에 놓여 있던 도장을 찍었다. 이곳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 속 프로도가 살던 마을의 작은 선술집처럼, 이곳은 생기와 활기로 가득했다.

바이킹의 후손쯤 되어 보이는, 주황색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아일랜드 남자들이 한쪽에서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른 점심시간에도, 그들은 이미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다림 끝의 따뜻한 한 끼

우리가 자리에 앉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따뜻한 빵과 커피.

기다린 보답이 따뜻한 한 끼로 돌아왔고, 우리는 그 순간을 충분히 즐겼다.


써니의 영국식 유머

써니는 늘 그렇듯이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고, 가브리엘은 카페 콘 레체에 설탕을 한 움큼씩 붓고 있었다. 설탕이 잔뜩 들어가는 걸 보며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나는 써니에게 혹시 설탕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이럴 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써니는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I’m enough sugar!"


그 말에는 단순한 거절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건 영국식 유머이자 매너야. '내 인생이 이미 충분히 달콤하다'는 뜻이기도 해."

써니는 종종 이런 영국식 표현을 알려주곤 했다.


화장실 매너

길을 떠나기 전, 카페에 하나뿐인 화장실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문을 두드려 보니, 안에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써니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써니: "한국에서는 화장실 갈 때 노크를 많이 해?"

나: "네, 줄을 서 있다가 꼭 노크를 해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들어가요."

써니: "영국에서는 노크하는 걸 실례라고 생각해. 그냥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야. 노크하면 안에 있는 사람이 부담을 느낀다고 보거든."


써니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런 소소한 문화적 차이를 주고받는 순간들이 순례길을 더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피아와의 대화

우리는 여유롭게 식사를 마쳤다. 어느새 비바람이 조금 잦아들었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쯤, 피아와 다시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제도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했지만, 폭우 속에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피아는 어제 나눈 대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제는 비와 바람에 휩쓸려 분위기가 산만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말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하였다

나는 길을 걷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부고, 그리고 20살 때 부모님의 이혼 이후 인간관계에 등을 돌리게 된 일들까지. 차분히 말하려 했지만,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아니, 한 번 터진 눈물은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이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빗물과 뒤섞여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피아는 자신이 나를 울렸다고 하면서도, 조용히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도 격식을 차리며 위로하던 영국인 아줌마는 이제 진짜로 마음을 열고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길을 걷기 시작한 초반, 나는 앞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막막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온전히 이 길 위에 서서 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정은 피아와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동안 소홀히 하고 등을 돌렸던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그 만남이 나를 더 크게 울린 것인지도 모른다.

큰일을 당할 때마다 타인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걸으면서도,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피아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순례자들이 있었고, 내 마음속엔 아빠와 그리고 한국에 있는 엄마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며, 혼자이면서도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인간관계

부모의 이혼은 분명 이혼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나 역시 부모님의 이혼 이후, 사춘기 같은 격변의 변화를 겪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피아는 가브리엘과 막내딸을 키우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과거의 트라우마도, 미래의 두려움도 아닌 오직 현재를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걸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느꼈다.


이름 지어주기

나는 피아와 길을 걸으며 가벼운 대화로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늘 젊고 활기찬 느낌을 풍겼다. 그래서 피아의 "아"와 젊다는 의미를 담은 "영"을 조합해 **"아영"**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피아도 답례로 가브리엘과 함께 심사숙고해 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들이 선택한 이름은 **"Isabella"**였다. 그렇게 우리는 유럽과 한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이름을 주고받으며 더 가까워졌다.


2023년 10월 28일. 그날, 순례길 위에서 영국인 가족, 미국인 게일과 함께 마치 한 가족이 된 듯 마음을 열고 즐겁게 걸었다. 결국 내가 이 길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너무도 진부하지만 결국 **"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마음을 다해 사랑을 전하면 꼭 그 사람에게서 답이 오지는 않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상처받았던 마음이 조금씩 아물고 치유될 수 있다는 것.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 위에서, 나는 또 하나의 값진 경험을 쌓았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고, 두 번째 휴식처를 향해 걸었다.

길 위에서는 비와 바람, 그리고 햇살이 번갈아 가며 나타났다. 하지만 맞바람이 심해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어야 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 많이 울어서 배가 고팠다.



두 번째 휴식 – Café-bar Pensión Tasaga / A Salceda

우리는 비와 바람을 피해 두 번째로 카페에 들어갔다. 너무 심하게 울어 진이 빠진 몸을 녹이기 위해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브리엘처럼 설탕을 듬뿍 넣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바닥난 몸을 빠르게 충전하는 데는 단맛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없으니까.


가브리엘은 내가 설탕을 넣는 모습을 보더니 실실 웃었다.

"거봐! 너도 설탕 넣어 먹잖아?"

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비에 흠뻑 젖어 꼭 생쥐 같은 몰골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뜨거운 커피로 몸을 녹이고, 화장실도 다녀온 후 다시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아까 카페에서 여기까지 5.9km를 걸어왔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울었고, 거센 비바람 속에서 걷느라 모두가 금세 지쳐 있었다.


몸 상태

Ribaso에서 A Salceda까지 14.2km. 이제 겨우 반을 걸었을 뿐인데, 마치 20km는 걸은 것처럼 발이 무겁다.

며칠 전부터 내 신발은 이미 고어텍스와 비브람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방수 기능이 무용지물이 된 채, 젖은 운동화를 신고 걷고 있었으니 우린 정말로 더 발걸음이 더디고 지쳤던 것 같다.


Santa Irene/위험한 국도 건너기


써니는 늘 차분하면서도 빠르게 걸었다. 피아나 게일보다 한 템포 앞서 나가곤 했고, 때때로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도로 위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걸었다. Santa Irene에 도착했을 때, 게일이 숲길로 가야 한다고 손짓을 했다. 나는 한참 뒤에서 후발주자로 걷고 있었고, 멀리서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그 뜻을 이해하려 애썼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근처 카페로 들어가 쉬겠다는 뜻이라고 착각했다.

숲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던 카페로 들어가 게일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아, 숲길로 가야 했구나’ 하고 깨닫고, 마을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산타 이레네 예배당 방문을 위해 좌측으로 꺾기
이 지점에서 22.745km가 적힌 비석이 나타나면, N-547 국도 아래로 지나가고 산타 이레네 예배당 앞으로 지나가기 위해 좌측으로 꺾어야 한다.
다른 길- 정면으로 직진.
두 길 모두 산타 이레네 바 앞에서 만난다.
자료: 브엔 까미노 앱


22.745 km 갈림길

비가 퍼붓는 숲길을 혼자 걷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번개가 치지는 않았지만, 강풍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원래는 왼쪽으로 향하는 비석을 따라 굴다리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몰아치는 비와 바람 속에서 앱을 확인할 여력조차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결국 굴다리를 빠져나와 직진으로 숲길로 들어섰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있는 삼나무들이 비에 젖어 나뭇가지를 바닥으로 떨구고 지대가 낮아진 탓에 일부 나무들은 거의 쓰러질 듯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숲을 지나 첫 번째 대피소에서

숲을 뚫고 나가자 첫 번째 대피소가 나타났다. 잠시 쉬면서, 아까 첫 번째 카페에서 함께 비를 피했던 성격 급한 프랑스 여자와 그녀의 일행을 다시 만났다. 나는 혹시 키 큰 할아버지, 게일이 이곳을 지나갔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다시 길을 나섰고, N-547 도로변에 우두커니 서 있는 Albergue de Peregrinos de Santa Irene를 지나쳤다. 빗속에서도 마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예쁜 그 건물은 잠시 나를 멈춰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발길을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숲길로 접어들었다.


그때 피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브리엘과 잠깐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시도했지만, 비가 퍼붓는 와중에 핸드폰을 조작하는 것도,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로 위치 사진을 주고받았지만, 그들은 이미 다리 아래로 내려가 예배당 쪽으로 좌회전해 길을 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다시 길을 돌아가려 했지만, 짊어진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며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불과 7분 거리. 하지만 이 빗속에서는 꽤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결국 알베르게를 지나쳐 대피소로 다시 돌아갔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돌아가려던 언덕길은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오늘 피아와 나눈 이야기들이 마음을 쓰이게 했던 것 같다.



갈림길에서의 해프닝

나는 원래 혼자 걷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혼자 걷고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하고 챙겨주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800km에 달하는 순례길을 걷는 동안 여러 사람과 짧게 동행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족처럼 보살핌을 받으며 걷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풍경이었겠지만,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나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기만 바빴다. 그 때문에 이 길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피아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때 보자는 메시지도 함께 남겼다. 저녁 6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작은 소동으로 끝난 이 갈림길 해프닝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빠르게 A Rúa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 어느덧 20.8km를 돌파하고 있었다.


O Ped

마을 문패 라벨 동상이 마을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오늘처럼 날씨가 변덕스러워 비가 쏟아지고, 흙길이 온통 진창으로 변하는 날이 다시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일은 부디 맑은 하늘 아래에서 걸을 수 있기를.




드디어 도착! 16시 02분

Hostel Azul Cielo는 O Pedrouzo 마을 초입에 위치한 숙소였다. 멕시코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영화 코코에 나올 법한 해골 분장 무늬들이 프런트에 장식되어 있었다.

순례길의 숙소들은 대부분 순례를 완주한 이들이 운영하거나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도 순례자들이 길을 걸으며 큰 영감을 받아 예배당을 짓거나 순례자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순례길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역사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숙소는 넓은 마당과 작은 간판 덕에 비가 그친 뒤에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아 길을 지나칠 뻔했다. 처음에는 이곳이 숙소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숙소 앞을 서성이며 구글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느라 한참을 헤맸다.



체크인

숙소는 8인실 캡슐형 침대였다. 비에 젖은 순례자들을 위해 방 안에는 히터가 켜져 있었고, 화장실에는 헤어드라이어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방에는 나를 포함해 총 5명의 순례자가 있었으며,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방에 있던 히터 위에 젖은 양말과 신발을 올려놓고 축축한 옷가지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방은 나무로 만든 캡슐형 구조로, 공간도 꽤 넉넉한 편이었다. 문 입구에는 영화 코코에 나오는 해골 분장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서둘러 씻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사이 룸메이트들은 벌써 짐을 풀고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헤어드라이어기

샤워를 마친 후, 빠르게 머리를 말릴 수 있어서 무겁게 가지고 다니던 헤어드라이어기가 그 어느 때보다 유용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머리만 말리는 용도가 아니라, 젖은 빨래와 신발까지 말릴 수 있어 더없이 든든한 아이템이다.


스페인 무리들

전에 한 번 스페인 무리들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지 않은가? 혹시 이번에도 마지막 순례길 여정을 망치는 건 아닐까, 나는 조금 노심초사했다.

4명의 스페인 무리 중 유일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 옆 침대를 차지한 스페인 아줌마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맞은편 1층 침대를 쓰는 커플은 노부부였다.


정면돌파

지난번처럼 소음 속에서 잠을 설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이번엔 정면돌파를 하기로 했다. 그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AI 통역 앱 Say Hi를 이용해 대화를 시도했다.


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는 질문이 있어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서로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열고 한 발 다가가면, 시끄럽다고 여겼던 소음이 더 이상 소음이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나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질문: 길을 걸으며 스페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당신들은 항상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워 보였어요. 어떻게 그렇게 항상 즐겁게, 쉬지 않고 대화할 수 있나요?

이 질문을 하자, 그들은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랑스럽게 답했다.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들도 항상 함께 소통하려고 해.
그래서 늘 즐거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행복한 페르디난도 황소를 떠올렸다. 꽃향기를 맡으며 그저 행복해하는 황소의 모습처럼, 스페인 사람들은 소소한 순간들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기쁨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강한 인상 때문에 처음엔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막상 그 "시끄러운 소음"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니, 그들은 팔을 벌려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TMI

이 대화를 통해 나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스페인 부부 중 남자는 교수였고, 엄마와 아들은 함께 순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리아에서부터 걸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교수님은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에 크루덴셜 오피스에서 순례 증서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예약할 수 있는 사이트도 알려주었다.

크루덴셜 완주증명 등록 예약 사이트
https://oficinadelperegrino.com/registro-individual/

산티아고 도착을 앞두고

29일, 산티아고의 크루덴셜 오피스에서 순례 증서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예약을 신청해 두었다.

직접 방문해도 되지만, 줄을 오래 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니 또 하나의 큰 선물이 찾아왔다.


피아와 약속된 저녁 6시 30분이 가까워질 즈음, 방 안의 공기는 히터의 온기와 우리의 대화로 훈훈해졌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공간, 처음엔 어색했던 사람들 속에서 나 역시 어느새 따뜻하게 녹아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마침 게일에게 연락이 왔다.

길에서 나를 놓쳐서 걱정했다는 메시지였다. 이 길 위에서 누군가의 걱정과 따뜻한 마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오늘 하루만 해도 피아와 그녀의 가족들, 숙소에서 친해진 스페인 분들, 그리고 저녁 식사 장소를 공유하며 연락을 나눈 게일까지—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과 관심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길 위에서 홀로 걷는 순간이 많았지만, 사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저녁 약속 18시 30분

비는 그쳤지만, 언제든 다시 내릴 듯 검은 먹구름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나는 피아 가족과 게일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Taste The Way까지는 280m 거리의 직선 코스. 마을 풍경을 자연스럽게 감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를 완주한 후에는 무거운 트레킹화를 벗고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는다. 차가운 가을비에 젖은 샌들을 신으니 부어 있던 발이 서서히 식으며 시원한 감각이 퍼졌다. 예약을 해두었으니 시간에 맞춰 여유롭게 이동하면 된다.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피아 가족과 게일을 기다렸다.

보통 손님이 들어오면 직원이 주문을 받거나 인사를 건네는데, 이곳 직원들은 우리가 들어와도 별다른 반응 없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뒤이어 들어온 게일과 써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

결국,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와 다른 레스토랑을 찾기로 했다.



El Blue/ 저녁식사

첫 번째 음식점의 서비스가 너무 좋지 않아 나와 함께 이동한 우리는 El Blue라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마치 원탁의 기사들처럼, 우리는 구석의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때 수잔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 역시 근처 펜션에 묵고 있었고, 마지막 길에서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나는 함께 저녁을 먹을 수는 없지만, 혹시 식사를 원하면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이곳의 웨이터는 한 명뿐이었지만, 어제처럼 불친절하지도 않았고, 이전 식당처럼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당은 점점 사람들로 가득 찼고, 우리가 식사를 중반쯤 했을 무렵, 수잔과 그녀의 지인이 도착했다.

그분은 미국에서 연기를 하는 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길에서는 배우든, 유명인이든, 어떤 출신이든 상관없어졌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수잔은 목이 완전히 잠겨 있었고, 얼른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이렇게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순간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아 연신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웨이터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주문이 쏟아졌다. 나는 후추와 식초를 부탁했지만, 결국 직접 가져와야 했다.


저녁 스몰 토크

오늘 우리의 스몰 토크 주제는 내가 길에서 이탈했던 이야기였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는 것이 바로 스몰 토크다. 한국에는 이런 문화가 없다는 게 아쉽다.

나는 중학교 때 기숙사 학교에서 생활했는데, 하루가 끝나면 모두 모여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소감을 발표하고, 좋은 글귀를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작은 감각에 귀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길을 이탈했던 그날을 떠올리면,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연락을 주고받으며 꽤 긴박했던 순간들이 다시 떠오른다. 길을 걷는 중이라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고, 절대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두 번째 대화 주제는 한국식 이름 짓기였다. 나는 피아에게 아영이라는 이름을, 게일에게는 *계일(鷄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계일’은 음력 정월 초하루를 뜻하는데, 새해가 밝기 전 희망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게일은 나에게 “나도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라고 말해주었다.

진짜 아빠였다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것이다. 마치 특별한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와인을 두 잔씩 마셨고, 산티아고 메뉴와 와인값까지 합쳐 각자 20유로를 내고 내일 아침 출발 약속을 잡은 뒤 숙소로 돌아갔다.


다시 숙소로

6시 30분에 모였지만 장소를 옮기고 다시 모이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식사자리에 앉은 건 거의 7시가 되어서였다. 주문을 하고 식사가 제대로 시작된 건 한 시간이 훌쩍 지난 7시 30분이었다. 한참을 떠들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밖으로 나와 시간을 확인하니 9시. 맙소사!

꾸물꾸물한 날씨 속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가로등마저 꺼져,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오 페드로우조에는 성당조차 가까이 없어서인지, 밤이 되자 유령도시처럼 적막했다. 정말 이 밤이 걷기 위한 마지막 밤이라고? 이미 내 몸은 걷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에, 아쉬움과 지친 마음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방을 함께 쓰는 스페인 사람들 역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게 틀어놓은 히터 위에 널어둔 젖은 신발과 속옷, 옷가지들이 뜨거운 열기 덕분에 다행히 말라 있었다.

뽀송한 상태로 마지막 밤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일은 제발 밝은 해가 떠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곧이어 스페인 분들이 방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서로의 완주를 축하하며 따뜻한 인사를 나눴다.

판초로 만든 커튼 안 침대로 들어갔다.


내일을 준비하며

내일, O Pedrouzo에서 Santiago까지 19.3km. 내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10월 29일이 될 것이다.

산티아고라는 길을 걸으며 쌓아온 나의 성장 이야기가, 마침내 도착하는 그 순간에 집약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길이 펼쳐진다.




번외 편: 당나귀 타고 산티아고

https://rolandante.blog.hu/

당나귀를 타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순례자가 있다. 현재는 자전거로 다시 그 길을 달리며, 직접 집필한 책과 제작한 스탬프를 가지고 순례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갑자기 당나귀를 타고 순례하는 순례자라니 황당하겠지만 오늘 길에서 만나 스탬프를 찍어줬던 기억이 인상적이어서 글을 남겨본다.


당나귀라니. 현대판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참고로, 지금은 자전거로 순례 중인 이유가 있다. 함께했던 당나귀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당나귀의 평균 수명이 약 30년이라고 했다.

이 순례자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그의 여정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정말 각자의 방식으로 순례를 걷는,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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