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수같은 비염
두바이 여행을 다녀온 후 매일 집 밖을 쏘다녔더니 ‘비염, 잇몸 통증’이 노크도 없이 나에게 왔다. 피곤하면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염증이 기어들어 온다던 의사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도대체 출근은 어떻게 했을까?) 그렇다고 침대에 누워 뒹굴기엔 바깥 날씨가 그리움이라는 봄인데 어쩌란 말인가.
천막에 비가 새듯 콧물이 줄줄 흘러 화장지로 코를 막았다. 추접한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봄이 왔다고 여기저기서 손짓하는 꽃도 보고 진한 커피도 한잔하잔다. 휴식이고 뭐고 나갈 채비를 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코에서 화장지를 뺐다. 나 원 참. 이건 장마철도 아니고. 이럴 때 필요한 건 손수건이다. 꽃무늬가 화려한 것을 골라 가방에 넣고 비상용 비염약을 한 알 삼키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걸어가던 중 제법 꽃봉오리가 열린 목련을 만났다. 조금만 더 벌어지면 ‘비염’에 좋다는 꽃잎들이 보일 텐데. 아쉬움에 한참을 바라보다 깜박한 치과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전 진료를 예약하고 목련꽃 봉오리를 눈에 담은 채 약속 장소로 갔다.
창밖으로 산수유와 홍매화가 보이는 포근한 브런치 카페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조용한 음악에 맞춰 사뿐히 걸어가 의자에 앉으려는데 친구가 ‘한번 안아보자’라며 나를 안았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전쟁이 터지기 전 두바이에서 돌아온 너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란다. 힘차게 끌어당기는 그녀의 어깨에 내 안경이 부딪치면서 얼룩이 졌다. 그래도 나는 창밖 꽃들보다 더 활짝 웃었다.
나를 안았던 팔을 풀며 친구는 며칠 전 장례식장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남편 친구의 서른여덟 된 며느리가 여섯 살 남자아이를 두고 떠났단다. 짠해서 울기만 했다는 말에 잠시 잊고 있던 내 잇몸이 다시 시큰거렸다. 커피잔을 들고 있던 내 오른쪽 손도 흔들렸다. 찰랑거리는 커피를 쏟을까 봐 잔을 탁자 위에 올리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신혼 초였다. 대학교 때 했던 어금니를 덮어씌운 보철에 문제가 생겼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치과에 대한 공포감에 차일피일 미뤘다. 더 이상 참기 힘든 통증에 침을 흘리며 치과를 다녀오던 날. 회식이라며 3차까지 하고 돌아온 남편은 치과 치료비 이야기를 듣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인데 친정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린 뒤 잠에서 깬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농담 한마디도 못 하던 남편이 코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경상도 톤으로 옹알거렸다. 마치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떼쓰는 사내아이처럼.
“장모님요 저 포항 김서방입니다. 혹시 하자 보수되는 교?”
다들 자는 시간에 느닷없이 하자 보수라니. 평소보다 더 묵직해진 목소리로 친정엄마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광희가 오늘 치과를 갔는데 치료비가 많이 나오네에. 이건 친정에서 하자 보수해 줘야 되는 거 아닙니꺼?”
술 취한 사위의 재롱 아닌 재롱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을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내일 아침 첫차로 보내게.”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남편은 술이 확 깬 표정으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은 수화기를 손에 쥔 채 나를 바라봤다. 남편의 멋쩍어하는 모습과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던 엄마의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로 남편의 어리광 섞인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물론 내 치과 치료 비용은 남편의 호주머니에서 나갔고.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며느리 죽음 이야기에 내 잇몸 통증이 심해진 건 아마 그날이 떠올라서였나 보다. 그때 전화를 걸었던 사위와 받던 장모님은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그곳에서 만났을 텐데. 서로 어떤 얼굴로 만났을까? 엄마는 하자 보수를 말하던 사위 등짝을 때렸을까? 나이 드신 장모님보다 먼저 길을 떠난 사위는 ‘죄송’하다며 자라처럼 목이 안 보이려나.
카페 밖 홍매화와 산수유가 흐릿해졌다. 얼룩진 안경알에 눈물이 맺혔다. 봄은 그리움이라더니 목련꽃 봉오리와 산수유, 홍매화가 문을 활짝 열고 눈물을 불러들였다. 여섯 살인 아들을 두고 가는 젊은 엄마의 기가 막힌 슬픔도 바람이 되어 나에게로 왔다. 나는 얼룩진 안경을 벗었다. 재채기와 함께 쏟아지는 콧물과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친구에게 '이건 순전히 비염 탓'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친구와 카페를 나와 꽃길을 걸었다. 계속 재채기를 하며 눈을 비벼대는 내 꼴이 보기 싫어 '오늘은 여기까지'라며 친구와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목련꽃 봉오리 입이 조금 더 벌어져있다.
'그래 이게 봄이지. 볼 때마다 설레고 두근대게 하는 묘한 향기를 풍기는 봄. 볕 따라 슬픔도 사그라들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