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E Ohio, Chicago, IL
시카고에서 일을 시작한 첫 해, 나보다는 다섯살 쯤은 어린 VP("Vice President", Analyst, Associate 이후에 승진하는 직급)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았다. 첫해를 빼고 다음 해부터 거의 매년 직함이 바뀌었고, 매년 연봉은 두 배씩 올랐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상사와 치열하게 협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이루어갔지만,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일을 잘했다. 나는 글로벌 최대의 연기금 중 한 곳의 초기 포트폴리오를 직접 구축했던 운용역 중 하나였다. 내가 고객이었던 시절 원했던 것들을 나의 고객에게 가져다주고자 했다. 오래지 않아 한국과 일본, 중국 투자자들에게 꽤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되었고, 회사와 동료들이 부응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몰래 일을 더 해서라도 메꾸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들이 고객들의 신뢰로 이어졌다.
좋은 결과들과는 별개로, 나는 점점 더 외로워져갔다. 한국에서의 야근으로 걷지도 못할만큼 허리가 상했던 안사람은, 몸의 건강은 점차 좋아졌지만,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만큼은 아니었다. 마음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길 없는 미국에서의 삶을 버거워했다. 내가 하나씩 거두는 성공이, 그녀에게는 점점 더 늦어져만 가는 본인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사무실에서의 인종차별은 여전했다. 나에게는 하루하루 치열했던 삶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쉽게 보였다. 하지만, 그에 맞설 수록 나는 한 명 한 명 더 내 곁의 이들을 잃어갔다. 내부 변호사는 다른 이들이 잘하니, 도움을 청해 함께 일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을, 맥락도 없이 꺼냈다. 언짢아하며 말하는 나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낸다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나는 점점 병들어갔다. 그나마 언어와 삶이 익숙해져 가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나는 점점 더 시카고안(Chicagoan)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는데 3년이 넘게 걸렸다. 시카고에서의 적응은 그보다는 빨랐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고립된 삶이 나의 적응을 도왔다. 나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 도시를 증오하면서도, 내가 사는 그 도시를 사랑하였다. 그렇게 5년을 보냈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멋지지 않은가? 미국 내에서 혹은 아시아 각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 그곳에서 수백억 수천억 규모의 투자 논의를 진행한다. 연이은 미팅으로 인해 대부분은 호텔에서 준비한 차량을 타고 다녔다. 저녁에는 투자자들과 크게는 몇백만원짜리 식사를 했다. 내가 그런 부분들을 더 즐길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미슐랭 스타 식당에서 웃으며 식사를 한 후에 체해 먹은 것을 다 토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왜 열심히 살고 있는 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악착같이 연봉을 올리려 했던 것일까? 아니, 돈은 왜 벌고 있는 것일까? 돈은 더 벌고 있는데, 왜 우리는 이다지도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거북목으로 쓰러지던 내가 그렇게 긴 비행으로 출장을 다니며 거둔 성공에 왜 빈말이나마 칭찬 한 마디 하지 못하는가? 왜 한국인이 한국에서 거둔 성공을 연말마다 싸우면서 증명해야만 하는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왜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의문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