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면 실력이 늘고, 화해하면 달리기가 편안해진다.
아이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가서 400m 트랙을 달리며 기록을 측정하고 있다. 매주 1등한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 우리 가족 신기록(아빠 제외)을 세운 사람에게는 보너스 상금도 있다. 참가만 해도 게토레이 한병씩을 준다. 이게 뭐 대단한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동네에는 걸어갈 수 있는 편의점이나 마트가 주변에 없다.
그래서 월마트나 코스트코에 나갈 때, 대량으로 사와야 한다. 한국에서라면 흔하디 흔한 음료수이지만, 캐나다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차를 타고 나가야만 사올 수 있는 조금 특별한 간식이다. 적당한 보상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어서 아이들이 열심히 달리면서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 아이들이 모두 달리기 훈련에 참여했을 때, 나이 순으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한번도 순위가 바뀌지 않았다. 한 명이 기권을 해서 두 명이 참여했을 때도, 나이 순으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큰 아들과 딸이 모두 기권을 했을 때만, 막내 아들이 부전승으로 1등을 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고등학교 1학년인 큰 아들은 이제 아빠와 키가 비슷해졌다. 신체 조건이 중학교 2학년 여동생과 초등학교 5학년 막내 동생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딸과 막내 아들은 세 명의 달리기 시합이 불공평한 경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아이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오빠와 형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도전하면서 달린다.
지난 2주 동안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아내와 러닝 데이트를 했다. 3주만에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학교 운동장에 나갔다. 날씨가 좋아서 옷차림도 가볍고 컨디션도 괜찮았다. 큰 아들이 이번에는 1분 30초 안에 들어오겠다고 하면서 자신감을 드러냈다. 운동에 별로 관심이 없던 아들이 조금씩 변해가는것 같아서 아빠는 내심 뿌듯했다.
출발선에 서서 "3, 2, 1, Go!"를 외칠 때마다 은근히 긴장된다. 아빠는 학창 시절에 100m 달리기를 하면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앞에 아니라 늘 뒤에서 1등을 하며 꼴찌로 들어왔다. 그래서 출발선에 설 때마다 패배감을 미리 맛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건 아무리 해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충분히 노력해보지 않고 나의 한계를 미리 정해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취미로 이렇게 달리기를 꾸준하게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사람이 변한다. 변할 수 있다.
세 아이들과 함께 출발선에 서서 "3, 2, 1, Go!"를 외치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추월당하고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달리게 될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빠도 열심히 달렸다. 뒤에서 누가 가장 앞서서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여유 부리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아빠가 결승선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시계를 보니 1분 20초였다. 3월 17일에 처음 최선을 다해서 달렸을 때보다 3초 기록을 앞당겼다. 나이가 들어도 꾸준하게 훈련을 하면 조금씩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게 느껴져서 뿌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큰 아들, 딸, 막내 아들 순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큰 아들이 1분 29초에 들어왔다. 3월 17일에 달렸을 때보다 7초 기록이 단축되었다. 엄청난 발전이다. 두 달 사이에 몸이 더 튼튼해지고 달리는 요령도 터득한것 같다. 가족 신기록을 세워서 $5 상금을 받게 되었다. 조금 후에 딸이 1분 37초에 들어왔다. 막내 아들은 1분 45초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딸과 막내 아들은 각자 자신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다.
달리기는 시간으로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스포츠이다. 그래서 잘 달린다고 하면 남들보다 빠르게 달리는 능력으로 흔히 생각한다. 아빠와 세 아이들이 함께 학교 운동장 트랙에서 달릴 때도,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달리고 있다. 상금이 걸려있기 때문에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하지만 위에 그래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지금까지 한번도 순위가 바뀌지 않았다. 옆에서 달리고 있는 다른 사람이 나의 경쟁상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난주 혹은 한달 전의 자기 자신과 경쟁을 하면서 달리고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내 경쟁 상대가 아니라 러닝 메이트이다.
달리기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과 경쟁을 하든지,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을 하면 실력이 향상된다. 하지만 전문 운동선수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매번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달리다가 부상을 입게 되면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된다. 몸이 다쳐서 아픈 것도 속상하고, 달리기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것도 너무 안타깝다.
뇌과학자들과 의사들은 달리기를 극찬한다. 달리기는 몸의 건강 뿐만 아니라 마음의 건강에도 유익한 운동이라고 추천한다. 평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 달리기를 꾸준하게 하면 마치 규칙적으로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돌보는 것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들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우울증 약이 필요 없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달리기가 즐거워야 한다.
나를 추월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굳이 따라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의 속도로 달리라고 내버려 두고, 나는 나의 속도로 달리면 된다. 어제의 나와 치열하게 경쟁할 필요도 없다. 어제 내 기록을 갱신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나 자신과 화해를 하고, 달리기와 화해를 하면서 편안하게 달리면 즐겁고 건강하게 부상 없이 오래 오래 달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