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는 없다
아이가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면서 스마트폰을 언제 쥐어줘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폰멍은 나란 사람의 쉬는 방법이기도 하다. 불멍, 물멍과 다르게 아주 자극적이고 희한한 콘텐츠가 스크롤을 따라 강물처럼 흐른다는 차이가 있다. 버스, 지하철에서 폰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작은 화면도 흘깃 보면 다 비슷하다. 우리 아이랑 지하철을 탔다가 같은 칸에 앉아 스마트폰 안 보는 사람을 세어봤는데 단 두 명이었고 그 분들은 자는 중이었다.
나는 주로 검색엔진에서 뉴스채널을 잡다하게 구독하는 편인데, 뭔가를 찾아보러 들어갔다가 관련 없는 기사의 헤드라인에 이끌려 무의식중에 클릭하고는 세상에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며 놀란 다음 실망하고 자책하며 돌아나오곤 한다.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사고 관련 기사들이 19금 딱지도 없는 채로 아무데서나 버젓이 알몸을 드러낸다. 자주 접하게 되니 마치 학교 앞에 범죄자 주거시설이나 유해업소가 없었으면 하는 엄마들처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나는 수영도 제대로 못 배운 아이를 무방비로 내놓는다. 어른인 나라고 안전하지도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뉴스들이 가랑비가 옷 적시듯 다시 그런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재생산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재 범벅 다섯 아이를 안고 업고 선 전쟁터의 아버지 사진은 AI의 정교한 속임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의 주인공이, 이스라엘 가족이건 팔레스타인 가족이건 간에, 우리에게 전쟁의 폐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은 사실이다. 예술과 문학, 아이들의 엉뚱한 상상이 오히려 진실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런 것들의 소식이 더 많이 흘러넘쳤으면 싶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훈훈한 세계뉴스를 전해주는 채널 구독을 눌렀다. 낯선 이의 선행, 화목한 가족 이야기, 아기와 동물 영상, 배꼽 빠지는 유머로 웃음치료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