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았지만, 따뜻한 밤

그날 밤, 나는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갔다.

by 푸른혜



가족 모임이 끝나고

동생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갔다.
막내는 무거운 백팩을 메고, 기차 시간이 촉박하다며 먼저 나섰다.

잠시 후, 떠나는 둘째를 부모님이 배웅하였다.


그리고... 이제 정말 나만 남았다.


원래 오늘 본가에서 잘 생각은 없었다.

엄마 생신만 축하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쉬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오니까 이상하게 더 있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늘 밤은 여기서 자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떠날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던 할머니는
내 말을 듣자 주름 사이로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안방 TV에서는 평소 잘 보지 않는 주말드라마가 흘러나왔다.

부모님과 나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친구들과 찍은 오래된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부모님은 더 이상 그 시절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사진 속 어린 나는 선명한데, 부모님의 기억에서는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겨울이 오는 밤은 9시만 되어도 칠흑 같다.
집안은 하나둘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졸린 눈을 비비다 결국 방으로 들어갔고,
큰 소리로 TV를 보던 할머니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야구 결승을 보던 아빠도 내일을 위해 불을 끄셨다.


그 분위기에 나도 노곤해졌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움직였던 피곤함이 이제야 몰려왔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자는 게 아쉽다.
오늘이 지나가는 게 싫다.


희미한 달빛 아래 책상 밑에 쌓인 책들이 보였다.
고등학교 때 좋아해서 샀던 책,
어린 시절에는 지루하다고 미뤄둔 건강 책들.


조명을 켜서 읽고 싶은데 방 안엔 불빛이 없다.
휴대폰 손전등을 조명 삼아 누운 채 읽기 시작했다.

배 아래는 따뜻했고, 이불의 온기는 금방 퍼졌다.

나는 그 열기 속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넘겼다.
이 시간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봤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책이 더 잘 읽혔다.


재밌어서 더 읽고 싶었지만
이제는 눈꺼풀이 버틸 수가 없다.


휴대폰 불빛을 끄고...

나는 조용히 꿈으로 여행할 준비를 한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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